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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한국적 민주주의, 그 이상과 좌절

최종 수정일: 6월 11일




근대 한국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민족해방과 연결된 문제였다. 20세기 초반, 많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민주주의」란 서구의 자유주의 맥락에서 이해되기 이전에 민족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다시 말해 주권국가를 바탕으로 민족이 주인이 되고 민족의 의사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체제가 곧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가 반드시 자유주의나 의회주의에 매개 될 필요는 없었으며 때때로 이것은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거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해방,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가진 세계관과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른바「민족적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정치이념적으로 안호상, 강상운, 한태수를 비롯한 정치학자, 사상가들과, 실천적으로 족청계를 위시한 자유당 조직에 의해 지탱되었는데, 40년대 후반 자유당의 창당이념이자 대한민국의 국시로 선언된 일민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민주의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민족 전체의 통합상태를 이상화하는 사상이었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 또한 민족주의적 통일성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문제인데, 일민주의적 시각에서 서구의 사회계약론은 허상이며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민의(民意)라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주관적 정신을 넘어선 보편적 민족의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의회나 정당과 같은 당파성을 가진 집단에 의해 대표될 수 없고, 오직 국민 전체의 대표자이자 가족국가의 가부장인 대통령에 의해서만 구현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민주주의에서 필요한 것은 의회주의적 토론이나 대화가 아니라 지도자와 국민의 철통과 같은 단결과 민족사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끊임없는 전진이었다. 이러한 민족적인 민주주의의 유형은 서방의 역사보다 앞서 만장일치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던 신라의 화백회의, 더 나아가서 단군시대로부터 연원한다는 것이 일민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였던 안호상의 설명이었다.


이러한 이념은 필연적으로 서구적인 정당정치나 의회제도와 충돌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일민주의자들은 기성 정치인과 의원들을 외세에 부역하는 꼭두각시, 민의를 배반하고 국회독재를 음모하는 자들로 비판하면서, 국민주권의 대표자인 대통령과 대중이 직접 상호작용하는 대중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현행 헌법이 아니라 도의(道義)이며, 구체적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현존하는 자유주의적 법질서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일민주의는 해방 후 불어닥친 민족주의적 해방의 열기 속에서 한시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에서 기인한 냉전체제의 확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전쟁의 결과 정착한 자유주의 - 공산주의의 이항대립적 도식은 일민주의와 같은 제3의 위치에 해당하는 이념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대 한국 사회에서 서구와는 다른 한국의 독자적 민주주의라는 문제의식마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 이승만을 몰아낸 4.19 학생의거는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가치 하에 촉발된 것이었으나,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제3세계 민족주의의 확산이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과제는 다시 한번 한국사회의 주요한 화두로 자리잡게 되었다. 정계에서 숙청되었던 일민주의자들 역시 이러한 조건에서 국민자주연맹이라는 조직을 창단하고 다시 한번 부활을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 민족적 민주주의를 전유하는데 성공한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1961년 5.16 군사봉기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1963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다시 한번 사용한다. 여기서 그는 서구와는 역사적 조건이 다른 한국에는 한국에 적합한 민주주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내세우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정치이념에 기초한 것인지, 어떠한 방향으로 실현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박정희정권이 그에 대한 나름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것은 1972년, 형식적으로 온존하던 자유주의적 질서를 전복한 10월 유신과 맥락을 같이 한다. 70년대 닉슨 독트린과 미-중 수교로 냉전적 질서가 균열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더이상 자유진영의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이 불확실해 지자 박정희는 유신이라 명명된 신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이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다.


72년 10월 17일 헌법을 정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그가 발표한 특별선언에서 그는 유신의 당위성과 관련해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내세웠다. 박정희는 결코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가 제시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세계관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보다는 40년대 후반에 제기된 일민주의적 민주주의 사고와 더 유사한 것이었다.


박정희에 따르면, 해방 후 한국에 직수입된 서구 민주주의는 한국의 역사적 전통과 사회적 현실에 적합하게, 비판적으로 소화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사회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합리적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지 못하고 무분별한 정쟁과 분열, 비능률과 혼란만을 낳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일민주의자들처럼 서구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부인하거나,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서구 민주주의는 한국 현실에 적합하게 「토착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표면적인 언설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은 자유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철학적 배경 위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당시 유신헌법을 작성한 법학자 갈봉근이 말한바와 같이, 국민의 주권이란 개체의 주권의 합산이 아니라 「집단 특유의 자율적 의사」였다. 여기에서 정치라는 것은 개체의 인권의 보장에 중심이 있지 않고 민족 전체의 의지의 구현, 그리고 그것을 위한 총화적 단결에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적 의지라는 것은 국회나 정당에 의하여 대표되지 않고 대통령 일인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이다. 갈봉근은 이러한 중간집단에 의한 부조리를 방지하고 지도자와 대중 사이의 직접적 접촉에 의한 대중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유신헌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고는 흔히 칼 슈미트의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박정희는 일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원을 신라의 화백제도에서 찾았다. 고대 신라에서 그러했듯 민족의 만장일치된 단결 속에 조국근대화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현이며 조국통일의 길이라는 것이 박정희의 생각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1) 민족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의사결정 모델 2) 국민주권의 대표자로서 지도자와 대중의 일체화 3) 분열과 혼란의 원인으로서의 정당과 의회제의 지양이라는 점에서 민족적 민주주의의 원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박정희 개인이나 그를 지지한 일부 이데올로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70년대의 급격한 근대화와 그에 따른 서구의 자유주의적, 물질주의적 가치의 확산에 대한 반감으로 형성된 대중사회의「한국적인 것」에 대한 열망과 궤를 같이한다. 서구적 질서에 의한 전통의 파괴, 무절제한 소비주의와 쾌락주의 문화의 열풍 속에서 대중은 박정희정권이 제시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념적 정당성과 별개로,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프로젝트가 과연 실천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79년 김재규의 총탄에 유신체제가 무너져 내렸을때 정권 내부, 그리고 국민 대중 사회에서 유신체제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유신체제가 그 이상과 별개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대체할만한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며, 또한 기층 민중의 열광적 호응을 얻을 정도로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을 갖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기반 없이 물리적 힘에 의존해 정권을 탈취한 박정권의 태생적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중사회에 깊이 뿌리박지 못하고 섣불리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하향식의 동원 형태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한국적 민주주의 프로젝트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이 실패한 곳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음지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민중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민족과 민중의 이름을 팔며 박정권이 실현하지 못했던 평등한 정치경제적 질서를 대중에게 약속했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세계시장과 국제금융자본에 불구가 된 조국이었다. 그러한 결과 우리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익명의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가축화 과정으로 이행하고 있다. 민주주의로 포장된 금권 과두정을 전복하기 위해,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진정한 민주적 가치의 실현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1. 기유정, <박정희 정권의 한국적 주체성론과 한국 정치학계의 자기 균열>

  2. 후지이 다케시, <해방 직후~정부 수립기의 민족주의와 파시즘>

  3. 김항, <총과 법전의 동맹>

  4. 박정희, 《한국의 민주주의》

  5. 안호상, 《일민주의의 본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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