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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열암철학이란 무엇인가?

최종 수정일: 6월 11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이론적 기초를 수립한 철학자 조반니 젠틸레를 두고 「파시즘의 철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젠틸레에게 「우리가 갈 길을 준비해 놓은 철학자」라는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만일 오늘날 우리에게 민족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닦아 놓은, 「우리의 길을 준비해 놓은」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다름 아닌 열암 박종홍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민족의 전통과 역사의 계승을 말한 사상가들은 수없이 많이 있었고, 또 그 한편에서 과거를 부정하고 해체하며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논한 이들 또한 필요한 이상으로 많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과 혁신은 반드시 부정적인 관계만을 가지는가? 민족의 전통을 진정으로 되살리는 동시에 사회의 변혁과 창조를 모색할 수 있는 사상적 방향은 없는가? 열암의 한 생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사상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분투한 생애였다.


그는 현실의 우리를 무시하고「위대한 상고사」에 병적으로 몰입하는 국수주의자도 아니고, 경계의 파괴와 해체를 부르짖으며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극단적 혁명파도 아니었다. 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현재의 창조를 통해 과거를 진정으로 되살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로 향하려는 「보수혁명」의 철학을 제시한 철학자인 것이다.


우리는 윙거와 하이데거, 에볼라의 철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거니와, 이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역사적, 현실적 조건 속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사상가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외국의 위대한 학자 수십명보다 무엇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던 철학자 한 사람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한국의 철학이 있다면 그것이 열암사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1.열암의 철학적 태도, '현실의 문제'


"현실이 문제다. 인식이나 판단의 대상에 그치기에는 너무나 세차고 억센 이 현실이 문제다. (...) 의식을 가진 인간조차 죽이고도 태연한 이 현실이 해결을 강박하고 있지를 않는가." (《지성과 모색》, 200p)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열암 박종홍의 청년기는 국내적으로는 조선이 일본에 의해 국권을 피탈당한 엄혹한 시기였다. 1919년, 평양고보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한 열암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한동안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옆 방에 수감된 친구가 일본 경찰에게 고문당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고민한다. 나는 왜 경을 쳐야 하는가? 한민족으로서 독립을 얻겠다는게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현실의 모순에 대한 고뇌 속에서 철학자로서 열암의 학문적 태도는 형성되었다.1)


혹자는 철학자로서 진리를 찾는 것이 제일의적 과제라고 하거니와, 이런 태도는 일제식민지라는 너무나도 억울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열암에게는 현실을 떠난 한낱 공상일 뿐이었다. 철학함에 있어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적 위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 우리 민족의「새로운 삶의 길」을 움터 나갈 수 있는가, 이것이 열암의 근본적 물음이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제일차적으로 체험하는 생활의 기반, 즉 현실 속에서 민족이 당면한 문제와 난관을 타개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실천의 정신적 동력으로서 작용할 때 「철학」이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열암은 "천상으로부터 지상에 강림하면서 이것을 설명하려는 원리로부터의 출발을 버리고 지상으로부터 천상을 향하여 올라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2)


그렇다면, 여기에 있어서 열암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문제가 된다. 열암철학에서 현실은 주로 「모순」이나 「위기」, 「한계상황」과 같은 극한의 상황을 드러내는 수사와 함께 사용된다. 전통의 인습과 타성에 젖은 사회에 있어서 「현실」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그 자체가 가진 모순, 대립물의 투쟁이 극한의 상태에 이르러 더이상 기존의 가치나 표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비상시의 상황 속에서 비로소 인간에게 자각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열암이 말하는 「창조」, 단순한 양적 발전이 아닌 질적 전환으로서의 역사적 변혁이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바라보는 당대의 현실은 그 내부에 모순을 내포한, 인간의「선구적 결단」을 요구하는 비상시로서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선험적 표준과 가치가 통용되지 않는 이 혼란기에 있어서는, 인간이 행위하는 실천이나 철학함도, 그대로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환기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3)


 2. 현실적 실천의 지반, 민족과 국가


열암이 현실을 말할때, 그리고 현실을 변혁하는 지도이념으로서의 철학을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철학」, 「우리의 현실」이라는 제약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고립되어서 현실과 마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자각할때 이미 거기에는 타인과의 상호교섭이라는 과정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인 것이며, 더 나아가 민족적인 것이다. 주체가 자각하는 현실이 외부와의 실천적 교섭을 통해 드러나는 한에서 이러한 민족이라는 종적 매개 없이 인간은 올바르게 현실을 자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 현실을 말할 때, 그것은 고립된 개인주의나 현실로부터 멀리 떠난 추상적인 세계주의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나와 함께 구체적으로 생활하고 호흡하는 우리,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민족이라는 것은 마치 「숙명적 중력장」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나의 의지와는 별개로 전통 속에 전승되어 오며 오늘날의 나를 규정하는 숙명적인 힘이다. 나는 어째서 이 시대, 이 나라에 한민족으로 태어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늘이 부여한, 이 땅에서 이 민족에게 성실하게 살라는 천명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에서의 실천을 말할 때, 그것은 민족공동체라는 구체적 단위를 매개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주체적 자각을 통해 그것을 적극적인, 자신의 역사로서 수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해 진다. "한국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하는" 과정을 매개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운명의 창조자, 민족사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민족공동체는 장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요,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또 몰락하는 국가와는 그 근본적 성질을 달리한다. 열암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어제 만든 국가도 있다. 하지만 어제 만든 민족은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 국가란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담보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차적 의미를 가지지만, 또한 역으로 국가를 매개하지 않고 민족의 성장은 담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된다. 일제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살아있었지만, 민족의 생명이 국가에 의해 방어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문화의 창조와 발전이 불가능한 제약조건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가지의 요소는 우리의 현실적 문제를 타개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서 이해된다.4)


3. 전통과 혁명의 변증법


"창조는 양적 발전이 아니요, 질적 비약의 과정이며 (...) 혁신적 비약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것을 그저 부정만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부정을 매개로 하여 근원적으로 전통이 목표하는 바 종국적 목표를 다시 긍정하는 과정이요, 발전적으로 살려서 계승하는 실천이다." (《박종홍전집 2》,173p)


이렇게 열암이 민족을 논할 때, 거기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전통이라는 것이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이라는 것은 공동의 역사적 체험을 통해 장구한 세월을 거쳐 생성, 발전하는 존재이며, 그 영향은 비단 혈연적 기체(성과 피)와 자연적 기체(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주체적인 국가생활을 영위하며 창조한 모든 문화적 유산과 관습은 우리의 정신적 영역에 침투해 있는 것이다. 민족을 숙명적 중력장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전통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열암에게 있어 창조란 단순한 양적 축적이 아니라 질적인 변혁의 과정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과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열암이 말하는 바, 과거와 단절한 「새로운 창조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인가?


앞서 강조하였듯 열암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이다. 그러한 한에서 열암철학이 가장 중요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라는 실천적 존재인 셈이다. 그리고 이 우리라는 존재, 현실에 존재하는 민족공동체는 과거의 제약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라는 것, 전통이라는 것은 단순히 고정된 실체로서 우리에게 전래되어 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존재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재해석 되고 또한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이다. 과거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필연적인 역사적 제약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그 과거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가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5)


그렇다면 열암은 우리의 과거, 민족의 전통으로부터 무엇을 보며 또 무엇을 구했는가? 열암이 한국사상을 연구하며 거기에서 일관되게 전승되어 오는 「빛나는 조상의 얼」로서 주목한 것은 바로 창조의 정신이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때 그때, 자신이 당면한 절대적 현재 속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그러한 창조의 역사의 총화가 바로 우리의 민족사라는 것이다.


열암은 우리 민족의 근본정신도 이와 관련해 설명한다.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홍익인간」을 지도이념으로 삼아 살아온 현세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천명사상에서 드러나듯 현실 속의 고달픈 백성의 소리를 하늘의 명령으로서 자각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고 또 새로운 창조의 길을 개척해 온 것이 우리 조상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듯 박종홍은 신채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소박한 국수주의 사상과 단절하고, 민족의 역사를 동적으로, 자기의 완성을 위한 영원한 투쟁의 과정으로 재구성한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에서 더이상 과거와 미래, 전통과 혁신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전통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결국 빛나는 조상의 얼, 창조의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이요, 창조의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은 과거의 유물과 단호히 결연하고 새로운 역사의 길을 개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오늘날 현실 속에서 우리의 과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선양하기 위해 실천할때, 민족의 전통은 그 실천 속에 현현하며 우리는 전통의 목표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오늘날 열암철학의 의의


열암이 철학을 하던 현실은 20세기 초의 식민지 시기, 그리고 해방 후의 빈곤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상이었다. 여기에서 열암은 민족적 해방과 조국의 근대화를 당면한 바 민족의 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열암이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것도, 유신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자신의 철학적 신념에 기인한 실천의 일부였다. 다만 그가 역사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에서 기인했다기 보다는, 그가 당면한 현실의 한계에 있지 않았나 한다. 열암의 위대한 철학적 신념을 이해하고 또 현실에 실현하는 과업은 유신체제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암철학은 아직 완전히 꽃피우지 못한, 개화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열암철학의 개화, 종래의 유신을 초월하는 진정한 유신을 일궈낼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열암에게 「민족혁명의 길을 준비한 철학자」라는 규정을 내리는 셈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도 기댈 수 없고 맹목적으로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질 수도 없다. 우리에겐 보수주의도 진보주의도 더이상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열암의 창조의 논리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제3의 보수혁명의 길을 제시해 주는 사상적 나침반과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유주의의 붕괴와 글로벌리즘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고 민족의 새 역사 창조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주석


  1. 고성애, <박종홍 철학의 형성과정 연구> 6p.

  2. 박종홍,《박종홍전집》1306p.

  3. 이수정, <열암 철학의 이해와 계승> 2p.

  4. 이병수, 《열암 박종홍의 철학사상》363p.

  5. "과거에서 무엇을 보며 또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는 미래에 대한 태도가 결정한다. 보통 과거가 그대로 내려와 현재가 되고 또 미래가 된다고 하나 인간의 능동적인 건설적 행위는 그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또는 고려시대의 역사에서 무엇을 보며 또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는 현재의 우리의 태도에 달렸고, 이 현재의 우리의 태도는 미래에 대한 건설적 의욕에 의해서 제약되는 것이다." (박종홍,《한국사상사》,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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