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작성자 사진충성 김

철기사상의 이해

최종 수정일: 2023년 4월 17일



이범석 장군은 일생을 민족혁명운동의 제단에 바친 영원한 민족혁명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그는 젊은 시기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만주의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투쟁하였고 해방 후에는 건국의 주체인 청년들을 조직하고 양성하여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싸웠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으되 그의 혁명정신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21세기 신민족주의 운동의 정신도덕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철기사상을 오늘날 소개하고 또 널리 대중화하는 것은 금일 민족운동을 조직전개해 나아갈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뜻깊은 일이 되는 것이다.


철기장군의 생의 일관된 실천으로부터 그의 사상을 도출해 낼 때 거기에는 「민족」이라는 일관된 주제가 관통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철기장군이 독립운동을 시작한 20세기 초반 서세동점에 놓인 조국의 시대상황에서 그는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게 민족을 찾았고 민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에 있어 박은식, 신채호를 비롯한 당대의 민족주의자들의 사상이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관찰할 때 거기에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국가와 국가가 피를 흘려 싸우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아수라장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은 각기 자유주의가 어떻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혹은 공산주의를 운운하며 싸웠지만 그 본질은 자기 민족의 이해에 있다는 것이 이범석장군의 통찰이었다. 그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이념이라는 것은 결국 앵글로색슨의 정치적 이해에 봉사하는 것이요,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것도 종국에는 슬라브족의 세계적 지배에 봉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허울좋고 그럴싸한 보편주의 이념이라는 것이 조선과 같은 약소국에 있어서는 외세의 지배를 위한 유용한 이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는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철기장군에게 있어서 세계주의라는 가치는 먼 훗날에나 실현될지 모를 「한낱 한가로운 사람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일본제국주의는 물론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공산주의 모두를 배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든 소련이든 그것은 하나의 외세에 지나지 않으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그들의 지배를 위한 무기에 지나지 않을때 완전한 자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비단 그것이 외세에 의한 식민화를 꾀한다는 점 뿐만 아니라 사회 내부의 정신적, 도덕적 병폐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에게 소련의 공산주의체제에서는 최소한의 인간적 자유나 권리도 부정당하는 가혹한 노예제도가 운영되고 있다고 보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러한 체제를 낳은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낳은 물질주의와 빈부의 양극화가 공산주의가 배태할 토양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보주의 역사관을 수용한 많은 이들은 서구화나 공산화가 진보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였지만, 철기장군은 어린시절부터 유학을 공부하며 동양의 순환론적 사유를 체득한 인물이었다. 그는 "1년에 4시가 있고 일생에 노소가 있으며, ‘무만년불후지목’(無萬年不朽之木: 만 년 동안 썩지 않는 나무는 없고)이요, ‘무백년불사지인’(無百年不死之人: 백년 동안 죽지 않는 사람도 없다)이라 한다. 이 지구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어기지 못하는 법이고 인간 사회도 대자연의 일부이거니와, 민족의 역사에도 진퇴가 있음은 생리상 차라리 당연한 일이라" 하였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그에게 있어서 조선의 쇠퇴도 영원한 것은 아니요, 제국의 패권도 불멸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서구세계가 주장하는 진보의 원리에 연연하지 않고 민족의 자유로운 주권국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철기장군은 우리 민족이 전세계 어느 민족보다 가장 민족적으로 완전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형성의 요소로 혈통과 영역과 문화와 운명의 네가지 측면을 제시하는데, 우리 민족은 이 네가지 조건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빈틈없이 훌륭하게 형성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민족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외국보다 더욱 이상향적인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철기장군은 믿었던 것이다.


철기장군이 구상한 민족국가란 「민족지상」의 기본 원리에 따라, "완전한 주권국가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역사적 독자성과 현실적 환경에 비추어 반드시 단일 민족국가일 것이며, 또 제도적으로는 어떠한 개인적 또는 집단적 특권도 허용치 않는, 따라서 주권은 삼천만 민족에게 있고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까지도 포함하여 온 동포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문화적으로 권리와 지위와 책임이 기본적으로 균등한" 국가였다.


따라서 그의 민족주의는 실천적 국가건설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원칙과 결합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물론 서구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민족 동일성의 원칙에 입각한 민주주의 체제였다. 그에게 있어서 민족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유기적 전체이며, 이 유기체의 의지를 실현하는 민주주의에 있어서 집단 내부의 분열이나 갈등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철기장군이 민주주의를 기율과 절제에 기반한 「예의염치주의」라고 설명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그는 현대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주체로 「군중」의 존재에 주목하는데, 그에 따르면 독재시대나 영웅시대는 과거의 산물이며, 오늘날에는 삼천만 민족을 의미하는 군중이 사회발전의 주체로 부상했으므로, 지도자라는 존재도 군중 속에 들어가 군중과 직접 호흡하며 생사를 같이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적 인식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철기장군에게 있어 이상국가라는 것은 삼천만 민족의 의지이며, 그의 이상은 지도자와 군중이 혼연일체 되어 일체의 특권과 지배관계가 일소된 직접민주주의 체제였던 것이다.


이범석 장군은 삼천만 민족이 국가의 주체라고 말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청년의 힘에 주목하였다. 청년이야말로 국가의 심장이며 살아 약동하는 민족적 생명력의 표상이라는 것이 장군의 생각이었다. 독일도 이태리도 터키도 바로 이 청년대중의 힘과 역량에 의해여 생기와 활력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요, 이범석장군이 해방 후 귀국하여 청년운동에 제일의적 가치를 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해방 후 정치적 실천은 어떠한 식으로든 그의 철학의 구현이며 일관된 수행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민족청년단은 물론이요 후대인들이 그의 최대의 실책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라는 것도 철기장군 스스로가 증언하는대로 직선제개헌을 통해 부패한 국회세력을 타도하고 "대통령 간접 선거제가 직접선거제로 개정되어 전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 이며, 그가 실현하고자 한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철기사상은 첫째 강대국의 패권경쟁에서 민족적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반식민지적 민족주의요, 둘째 내부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삼천만 민족의 평등한 주권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사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바 민족적 민주사상이 철기사상의 핵심이며 본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철기장군은 비록 이승만과의 정치투쟁에서 패배하여 그의 민족적 이상을 못 다이루고 우리 곁을 떠나였으나, 그의 이상을 계승하여 실천해야 할 의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철기의 이념을 계승하여 청년의 의지와 역량의 조직화, 통일을 이루고 거족적인 민족혁명운동을 계승 발전하여 이 땅위에 진정한 민주국가를 실현하는 길에 모든 피와 젊음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1. 전재호, <해방 이후 이범석의 정치노선 - 민족주의와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2. 임종명, <해방 직후 이범석의 민족지상, 국가지상론>

  3.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4. 이범석, 《우둥불》

  5. 이범석, 《민족과 청년》


Comentario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