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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조연현 - 합리주의의 초극



근대의 모든 사조나 사상이 합리주의에 의존해서 성장되어온 것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기초로 한 소위 과학적인 진보의 개념이라든지 헤겔이나 데칼트를 중심한 이성절대주의의 철학이라든지 맑스 앵겔스의 이론을 토대로한 유물사관이라든지 그외의 일절의 모든 근대의 사상적 산물은 모두가 합리주의에 의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합리주의를 떠나서는 근대의 개념을 상정할 수 없을만큼 합리주의는 근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이다. 근대의 승리는 확실히 합리주의의 승리였던 것이다.


이 합리주의의 승리는 근대의 종언과 함께 퇴각하지않고 현대에까지 그 여세를 연장하고 있다. 현대인은 아직도 현재는 과거보다 진화되었으며 미래는 다시 현재보다 진화된다는 기계적인 진화론의 공식을 그대로 암송하고 있으며 이성으로써 가능한 것만이 현실일 수 있으며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한개의 착각 아니면 환상이며 이성만이 우주의 모든 것을 인식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며 무기라는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물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물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이 가진 일절의 정신적인 영역을 부정하고 인간을 단순한 한개의 물질적 생산도구로서 유일한 미래는 공산주의 사회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고집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이러한 모든 것은 합리주의에 대한 근대인의 중독이 한개의 여독(餘毒)으로서 현대에까지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근대가 종언되고 현대가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서 지양되여가려는 오늘에 있어서 근대의 합리주의는 새로운 현대가 초극하지 않으면 아니될 대상의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현대인이 공식적인 진화의 법칙을 그대로 믿음으로서 막연한 과거에 대한 모멸과 미래에 대한 무책임한 양보로서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로마나 희랍이나 신라의 문화에 비하야 현대문화의 우위성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히 이성적으로 논리로 기하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현실적으로 실존적으로 가능할 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우리의 생리적 경험은 논리적인 배리(背理)가 심리적으로 실재할 수 있음을 체득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의 영역은 쇠스톱의 말처럼 무제한한 자유의 영역이지 이성의 제한적 자유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이성적 논리적으로 진실일 수 없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존적으로 심리적으로 진실일 수 있다는 것은 아리스트테네스가 아테네의 광장에서 이성을 발견한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져온 이성이 가진 일절의 권한과 권력과 그 제왕적 위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성이 절대제왕이 아닐뿐아니라 이성만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심리적 진실성을 새로운 현대인은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그리고 물질만으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인간의 광범하고 심원한 정신의 영역에 대해서 여지없이 무력할 뿐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절망적인 유물사관이 현대인의 정신적 치료를 어떻게 담당하며 공산주의의 경제균등의 성공만을 믿고 언제나 자유스럽고 독창적인 것을 지향하는 새로운 현대인의 개성이 어떻게 모든 인간의 획일화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근대의 모든 사상이 의거하고 있는 합리주의에 대한 불신임장은 물론 오늘 처음으로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일즉히 도스또옙스끼가 그의 문학에서 여기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표백하였고 쇠스롭이 그의 철학에서 합리주의의 종막을 대담하게 선언하였든 것이다.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도 사실은 서구합리주의의 몰락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의 일군의 시인과 작가들의 노력이 역시 이 합리주의에 대한 회의와 초극의 사업이었음을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현대의 전위의 정신들이 합리주의에 대한 초극을 우리들에게 충분히 승인시키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새로운 현대의 건설이 근대의 합리주의의 초극없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은 근대합리주의가 현대에 상속시켜놓은 일절의 모순과 불안과 절망의 해결이 없이 이 현대인이 근대를 졸업할 수 없다는 것에서도 명백한 것이지만은 합리주의에 대한 불안과 절망과 회의와 모순을 위하여 중세의 복구를 기도한다든지 함부로 비합리주의의 기치를 올리려는 자는 결코 아니다. 다만 여하한 형태에 있어서든지 합리주의의 초극없이 우리의 새로운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만을 강조할 따름이다.


(194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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