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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제1공화국 국가개조운동사 (1949~1953)

최종 수정일: 3월 3일



현재 국내외 정세는 아직도 질서 없는 혼란 속에 잠겨 있다 할 수 있으며, 이 혼란은 새로운 질서와 새 시대를 창조하기 위한 진통이 아닌가 한다. 이 혼란은 오로지 사상의 그것으로부터 된 것이다. 곧 근대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지상으로 하고 있음에 대하여, 공산주의는 이를 타도해서 그 개인을 계급으로 바꾸려는 데서 이해와 이해가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이 같은 이해, 곧 물질적 이해관계를 사회 존립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극단의 대립 속에서 심한 갈등과 마찰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그러면 이러한 세계사적 요망을 달성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 그것은 오직 신생 대한민국임을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삼팔선을 경계로 하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치열한 투쟁이 계속되는 사이에 우리는 이것을 직접으로 체험하고 있으며 여기에 필연적 귀결로서 새 세계의 이념이 우리로부터 생긴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새 역사의 싹인 것이며 새 세계의 길표인 것이다.》- 이범석


《우리 헌법이야말로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나 누구나 다 열복할 대헌장으로서 우리민족의 사상문제 해결의 성전일 뿐 아니라 남북통일의 유일한 관건이 될 것 (...) 우리는 이 헌법정신의 실천에 의하여 우리 삼천만 민족을 사지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국가의 이념적 영도국으로서 진정한 세계평화를 수립할 선구자가 될 것》 - 전진한


《건국이념은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생성한 신념이며 역사의 과정에서 체득파악한 진리이다.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국가의 이념이나 계급혁명과 계급독재의 공산주의철학은 우리 민족의 세계관이나 국가관과 근본적으로 서로 틀린 것이니 (하략) 우리의 건국이념은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은 지성에 의한 창조물이거나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단일민족으로서의 역사행정(歷史行程)에서 생성한 민족의 신념이요, 오랜 민족생활 속에서 우러나온 전통인 동시에 또한 민족독선의 배타주의나 민족비하의 사대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국제협조를 기조로 하는 민주주의이며 독점적 자유, 방임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정의에 입각한 진정한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선근


《반동하는 두개의 기존체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이승만대통령의 일민주의의 진정국가체제로서 종래의 위선국가는 지양되고 새로이 민족과 국가와 인류와 세계는 구원될 것이다. 이 위대한 사상체계는 대한민국에서 효시되어 전세계에 파급될것을 확신하며 우리민족은 이점에서 더 한층 세계사적 책임과 의무를 느끼는 것이다. (...)


공산주의의 치열한 반동을 분쇄함과 동시에 우리는 꿈틀거리고 일어나려고 하는 이 자본주의의 잔재를 제초(除草)하고 일민주의 진정국가를 건설하려는 이 강토위에 조금도 싹트지 말게하여야 할것이다.》 - 양우정


우리는 2차 대전의 종결을 곧 전후 냉전의 시작점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종종 대면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러한 피상적인 이해는, 전후 세계사의 전개, 특히 한국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을 놓치게 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1945년 8월 이후부터 1953년 7월에 이르는 이 역사적 순간은,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짧지만 중요한 순간이다.


1945년 일본 식민주의로부터 해방된 이후, 한국은 미국의 편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소련의 편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수용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 싸운 이들, 그리고 해방의 분위기에 젖은 대중의 민족주의적 감정은, 하나의 외세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일본과 다르지 않은 양측의 입장 모두와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열기는 한반도 남반부에서,「어떠한 국가를 세울 것인가」하는 질문 앞에 지도세력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은 민족주의적 신념과 지난 수십년간 목격한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에 대한 불신으로, 일종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와 같은 체제를 염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47년 미군정이 남한 대중을 상대로 벌인 조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많은「우익」청년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기록으로 부분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건국 과정에서 제헌헌법에도 반영되었으며, 또 제1공화국 초기 족청계라 불리우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 집단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여러 논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다.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지도했던 이범석장군이 47년 창단한 조선민족청년단에 뿌리를 둔 족청계는, 반공주의와 동시에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민족주의적인 동시에 조합주의적인 국가질서를 옹호하였다. 이범석장군과 그의 정치적 동지인 안호상, 양우정을 주축으로 한 이들은 공산주의자와 싸우는데 있어 공산주의의 존립근거인 자유주의나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였다. 안호상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세계역사상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만든 공은 인정하나, 그것이 가진 물질주의적 성격은 개인을 자신의 이해에만 몰두하게 만들어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계급적대와 계급갈등을 유발해 나라를 공산당의 본거지로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가 아닌 제3의 사상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이라는 단체 자체는 우익단체와 이승만의 위기의식에 의해 1949년 해체되었으나, 이범석과 그의 정치적 동지들은 전국적인 조직과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대중의 신뢰를 얻고 있었기에 제1공화국 초기 주요한 지도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제1공화국 초기의 지배적 이념으로 제시되었던「일민주의」에 대해 언급할 것인데, 여순사건 등으로 대한민국이 존립 위기에 처한 1949년 족청계를 중심으로 창안, 보급된 이 이데올로기는 한민족이 단군 이래 하나의 문화, 하나의 핏줄로 이어져 왔다는 단일민족의 신화를 바탕으로, 전국의 동포를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으로 하나로 통합하여 일민(一民)의 세계, 통일된 가족국가를 건설한다는 주장을 모체로 두고 있었다. 주권을 가진 단일 민족은 외부로부터 독립적일 뿐 아니라 내부의 어떤 파벌이나 특권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는데, 이것은 일민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할때 지칭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반외세적 - 민중주의적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민주의자들이 당파주의적 분열에 대응하는 민족통합의 표상으로 내세운 것은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었다. 이승만은 가족국가의 지도자로서 전국민의 의지를 체현한 존재로서 인식되었는데, 일민주의자들은 이러한 국민적 지도자와 대중이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형태의 정치체제로서 일종의 직접민주주의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이들은 기성정당과 정치인들을 민족을 분열하는 특권세력으로 규정, 비판하면서 정당정치를 배격하는 별도의 국가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민중주의적 성향은 인민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기성의 질서나 체제를 부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범석장군을 비롯한 족청계 인사들은, 일민주의보급회와 일민구락부를 결성하고 전국에 일민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보급하였으며, 대한국민회를 조직해 전인구를 포괄하는 국민단체를 형성하였다. 전국민을 단일조직에 포괄하여 지도자와 직접 결속하게 만들려는 이러한 구상은, 그 실천과는 별개로 독일과 이태리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도 실행되지 못한 야심찬 것이었다. 족청계가 주도해 창당한 집권여당인 자유당은 51년 중화민국으로 외유를 떠난 이범석이 국민당의 개조를 보고 영감을 받아 창당한 것으로, 이 정당을 통해 족청계열 인사들은 대한민국을 중화민국과 같은 당-국가체제로 재편하려 하였다.


이 자유당의 조직을 바탕으로 이들이 실행한 사건 중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록되는 것은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라는 것으로, 이는 52년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전개된 이승만정권이 의회에 맞서 전개한 일련의 쿠데타사건을 의미한다. 이 사건에서, 족청계를 비롯한 친이승만세력은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도모하는 야당세력을 「국회독재를 모책하는 특권세력」으로 비난하면서, 이들과 연계를 가지고 지원하던 유엔과 미국의 내정간섭을 동시에 비판했다. 단일민족의 가족국가가 되어야 할 한국에 있어서, 외세의 지원을 받는 의회주의 세력은 민족의 적인 동시에 민중의 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범석을 수장으로, 안호상을 이데올로그로, 양우정을 선전가이자 전략가로 두고 대국회 압박 투쟁을 벌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유당의 조직과, 또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족청계의 영향력을 토대로 대중을 동원하여 국회를 압박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발췌개헌」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성취하게 된다.


이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이들이 외세의 간섭과 의회의 독재에 맞서 옹립하고자 했던 지도자 이승만이 바로 내부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알려져 있듯 이승만은 미국에서 기독교를 수용하고 미국식 교육을 받고 서양인 부인을 둔 친미 엘리트였으며, 설령 그가 미국의 간섭에 맞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는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재편하려는데 있었다. 이승만정권은 부산정치파동에서 승리했지만, 그를 중심에서 지지했던 족청계는 숙청되었으며, 이는 한국전쟁 이후의 세계가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제3의 길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족청계의 주요한 이데올로그였던 안호상이, 전후「자본제국주의와 공산제국주의에 맞서야」한다는 연설을 한 직후 친공산주의적 발언을 한 혐의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투옥되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한국전쟁의 이전과 달리, 전후의 세계는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공적인」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시가 「자유민주주의」, 혹은 「반공산주의」가 된 까닭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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