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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혁명철학원론 해설 (3) 민족운동의 과거와 미래




 저자 김갑식은 <혁명 철학 원론>에서 이승만 체제하에서 이범석과 족청계가 이끌고 박정희가 이어받은 역사적 민족운동을 평가하고 그로부터 미래의 민족운동의 과제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저자가 발견한 주요한 특이점은 우선 민족운동은 ‘비상시에’, 특히 특정 질서의 공백기나 해체기에 발생했다는 점, 그리고 민족운동은 국가와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를 확고한 사상, 조직적 역량, 사회적 여론으로 뒷받침하는 4대 기반이라는 요소가 실현을 위해서 필수 조건이란 점이고, 이러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지 못한 이범석과 박정희는 제대로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객관적 시대조건이라는 요소에 못지않게 주체 자신의 역량이, 또 실천적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민족이 당시 물 샐 틈도 없이 조여오던 서구 자유주의의 손아귀를 곧장 뿌리치기에는 분단 질서와 사대 세력, 내부의 모순을 비집고 들어온 강대한 외세의 개입, 또 경제나 국방의 측면에서 타국에 의존하는 후진국의 처지에 놓였다는 객관적 시대조건의 냉혹한 현실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이처럼 엄격한 현실 인식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세계관과 운동도 어쩌다 운 좋게 빛을 발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좌초될 운명일 것이다.


그러나 객관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무찔러야 할 자유주의 사상의 근본적인 속성이 바로 어디서나 객관성을 강조하고 전인적 인간상을 멀리하며 온갖 분야의 고립된 전문가 집단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제국주의나 엘리트주의는 물론이고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와 같은 서구 근대적 정신에서 발달한 사상과 이념들이 모두 객관성에 대한 전방위적인 세뇌와 집착으로 수렴한다. 어째서인가? 객관적 지식만이 진정으로 ‘옳기 때문’인가? 우리는 객관성이라는 우물로부터만 진리를 길어 올릴 수 있나? 그러나 오늘날 주체를 왜소하게 만들고 혁명을 좌절하게 만드는 모든 무기력의 원인이 바로 그 객관성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에서 말한 것처럼 “몰락 가운데 윤곽이 가장 명확한 것은 우리보다 앞선 ‘그리스-로마의 몰락’이다.” 화려했던 고대 그리스-로마 이후 문명의 몰락이라는 징후를 숨길 수 없는 그간의 서양사를 돌이켜본다면 이 점이 뚜렷해진다. 중세에는 신이란 객관이 인간의 주인이었고 근대에는 과학이란 객관이 인간의 주인이 되었는가 하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돈이란 객관이 인간의 주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각 시대에는 언뜻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그 모든 단계에서 인간이 참다운 주인이 되는 이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점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주체여야 할 인간은 그저 다른 객관적 우상의 수동적인 노예로 전락해 버렸으며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족쇄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는 자들도 허다한 것이다. 일찍부터 이러한 현실을 꿰뚫어 본 니체는 서구의 기독교, 기계론, 자본주의를 모두 날카롭게 비판했는데 그 비판의 기저에는 주체로서의 인간, 인간주의에 대한 그의 절박한 호소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저자가 밝히듯 한민족의 공동의식에는 이미 ‘자아에서 천지의 분신을 발견하는’ 인간주의가 내포되어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또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인간이 진정한 주인으로서 자립하기 위한 해답이 놓여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 시대조건의 유불리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주체 자신의 역량과 의지에 비한다면 대단한 중요성을 갖지는 않다는 점을 재차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떻게 하면 그런 객관적 시대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와 역량만으로는 부족하고 다수의 의지와 역량을 한 데 집중시킬 수 있는 민족운동의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본서는 민족운동의 기반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하고 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상기반, 둘째는 그러한 운동을 주도하는 조직을 구성하는 조직기반, 셋째는 조직이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사회기반, 넷째는 그러한 영향력을 이용해 체제를 전복하고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국가기반이다.


저자는 과거 민족운동이 실패했던 것은 결정적으로 외세의 개입 때문이지만, 우리가 그런 외세에 힘없이 무너져야 했던 것은 주체세력이 확고한 사상기반과 조직기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렇기에 이범석은 이승만에 의해, 박정희는 김재규에 의해 제거당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늘 서구 자유주의 세력이 있었다. 또한 사상기반과 조직기반 못지않게 사회기반이 중요하다. 국내의 좌경 세력은 비록 정권을 잡지는 못했으나 대학, 시민단체, 언론을 점거하여 명줄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유신 체제는 사회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민족청년단은 이를 확보했으나 지속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민족주의의 지적 · 도덕적 · 문화적 헤게모니를 바로 세우는 지속 가능한 사회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먼 미래의 일이지만 국가기반을 확보하는 데에 있어서도 동학농민운동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에만 치중하거나 고려 무신정변처럼 현실과 타협하여 신체제가 구체제와 공존하는 이중적인 체제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김갑식은 전자는 실질적인 권력으로 성립하기 어렵고 후자는 양자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그러므로 민족운동은 총체적인 변혁을 도모해야 한다. 문제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뜯어고치는 식의 자잘한 개혁은 반드시 내부적인 모순에 직면하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제, 사회, 문화 어느 것 하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무차별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구체제는 물론이고 기성의 관습과 규범도 갈아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체제는 양적 변화에 머물지 않고 질적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세계관의 올바른 정립은 또한 다른 세계관과의 차이를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자는 진정국가가 자유주의 체제와도 사회주의 체제와도 다른 제3의 노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소수 특권세력에 봉사하는 금권 과두정을 척결하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반대하며 국민 복리를 증진하는 복지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진정국가의 상이 사회주의와 유사해 보인다는 오인을 살지도 모른다. 실제로 민족혁명 세계관이 추구하는 진정국가의 상이 종종 좌경 사상과 유사해 보인다는 이유로 좌경 세력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와 오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자유주의의 반대는 독재고 사회주의다”와 같은 국내외의 보수 우파나 대중의 인식들이 바로 그런 오인의 결과라 할 것이다.


민족운동에 있어서 사상기반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이런 오인을 교정하고 노선을 명확히 하는 데에도 있다. 저자는 혁명을 통한 체제의 ‘질적 비약’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민족혁명 세계관은 양과 질에 대한 사유에서도 좌경 세력의 세계관과는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양질 전환에 관해 설명하는데, 그 논리는 간단히 말하면 양을 늘리면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나중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양질 전환의 법칙’으로 정식화한바, 여기서 자본주의의 양적 팽창으로 인해 생긴 경제 위기와 같은 내부 모순이 공산주의로의 질적 변화를 이루어 낸다는 진보주의의 핵심 논리가 등장한다. 한 체제는 필연적으로 다른 체제로 옷을 갈아입게 되어있으며, 따라서 역사의 진보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한편으로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어떻든 간에 진보는 필연적이므로 그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을 두둔하는 데에도 쓰이고는 한다.


그러나 필연성이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지도 미결 사항이거니와, 우리는 양적 발전이 질적 발전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지도 철저히 의문에 부쳐야 한다. 특히 우리가 인간 개개인의 질적 가치에 집중한다면, 양적 발전은 질적 발전을 불러오지 않는다는 점이 꽤 명확해 보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물론의 토대인 기술 및 생산력은 발전할 수 있겠으나 절대다수의 인간은 그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지식과 인구의 양은 나날이 늘어만 갔을지언정 지성은 게을러지고 의지는 쾌락만을 추구하며 점진적으로 퇴화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의 결과인 근대적 인간이 과연 고대나 중세의 인간들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존재이며, 또 계속해서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낙관적인 전망이라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비관적인 전망이라면 니체가 예언한 인간 말종, 즉 ‘최후의 인간(Der letzte Mensch)’의 시대가,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수평적으로 동질화되고 고통 없는 행복과 금욕 없는 쾌락만을 추구하며 주체로서의 성장이라고는 없이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수동적 허무주의자들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이처럼 무한한 자극에 의해서만 지탱되는 삶은 밥 먹고 똥 싸고 떡이나 치면 그만이라는 농장 가축의 삶과 진배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과 사회를 언제나 유기체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진보가 만사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진보의 이념은 종국에 지배자들에 의해 사육당하는 수동적 인간들의 축사를 건설하는 데에 다다른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필자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를 골랐을 뿐이지만, 그들의 이런 실수는 모두 결국에는 모든 개별성을 오로지 보편성으로 환원하려고 하는 헤겔류의 보편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나타난 것이다. 민족혁명 세계관은 이런 대전제를 공유하지 않으므로 좌경 세력의 세계관과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 이상, 우리 세계관과 운동 전체가 겨냥하는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저자 김갑식은 이렇게 말한다. :


“인간주의와 조상숭배와 토착주의를 그 근간으로 하는 민족의 본원적 의식과 조화하고, 또 이러한 민족정신을 새 시대에 걸맞는 창조적 세계관으로 승화하여 서구적 자본의 논리로부터 독립된 민족의 본원적 국가, 진정국가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 민족혁명의 최종적 지향점인 것이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본서에서 여섯 가지 도안을 제시한다. 각각은 우리의 민족운동이 목표로 하는 진정국가의 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여기에 필자는 독자들이 본서를 본격적으로 읽어 나가기에 앞서서 개략적인 내용을 파악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섯 가지 모두를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다. 본서에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이미 오늘날 달성된 것처럼 형식적인 국민국가로서의 주권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에서의 독립, 세계관에서의 독립, 체제와 제도에서의 독립, 외교와 국방에서의 독립을 모두 빠짐없이 챙겨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 어느 한 가지 요소라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언제고 형식상의 독립에 머무를 뿐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미처 청산하지 못한 병폐들이 언젠가 벽에 핀 곰팡이처럼 재증식하기 십상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외세로부터 일방적으로 단일문화를 강요받는 위치에 있으며 서구는 그 근본에 있어서 우리 민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부적당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치 성년이 되고도 어머니에게 모든 면에서 의존하던 아들이라면 더더욱 단호히 그녀의 걱정 어린 손길을 뿌리쳐 내야 평생 마마보이로 살다 죽는 꼴을 면할 수 있는 것처럼 외세의 지배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길든 우리 민족에 있어서도 보다 급진적인 혁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둘째는 민주주의국가의 건설이다. 위와 마찬가지로 혹자는 “민주주의국가는 이미 80년대의 ‘민주화’를 통해 성취되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종래의 민주주의는 피의 법칙이 아닌 황금의 법칙에, 즉 자본의 논리와 더불어 제국주의 지배자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본원적 심정과 진정국가가 추구하는 본래의 이상향과는 판이한 것이다. 근본적인 차이가 생겨나는 지점은 사적 이익추구를 공적 대의명분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도입된 자유주의에 있다. 정치인들은 언제나 국민 분열을 지양하고 국민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둥 미사여구를 섞은 말들을 마구 떠들어대지만, 계층 간의 극렬한 갈등이 좀체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오늘날 서구 국가들의 참담한 광경에서 보다시피 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그것은 요원한 것을 넘어 불가능한 목표이고 단지 대중을 노예로 조련하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주의에 기초해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창출해 내야 하며, 그것은 진정국가가 목표로 하는 중용의 덕의 구현과도 궤를 같이한다 하겠다.


셋째는 경제체제의 변혁과 사회복지체제의 확립이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는 달리 사회정의 관점에서 경제체제를 일신하여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을 착취하는 기생적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경제는 국가와 민족의 공적 목적에 복속하였으나, 근대에 이르러 황금만능주의로 변질되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정신의 변혁뿐 아니라 경제체제의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우선 국가와 국민 간의 상호의무 관계가 공고화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국민 생활을 책임지고 복지를 실현해야 하고, 국민은 국가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하며, 협동조합 단위 경제체제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국민이 언제나 지금과 같은 피라미드의 수직적 구조 꼭대기만을 쳐다보며 상류층이 되기만을 소망하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계급과 계층이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며 상생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이라야 한다.


넷째는 민족정신문화의 창달이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물질을 탐하는 천민적 인간만을 생산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귀족적 인간은 땅에 떨어진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민족혁명은 사회체제 변혁뿐만 아니라 인간 의식과 정신문화의 변혁을 포괄해야 한다. 서구 자유주의 정신문화는 유물론과 더불어 개인의 욕망 추구에 바탕을 두고 있어 귀족 정신에 입각한 고귀한 취향을 형성하는 데에는 명확한 한계를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신문화인 인륜, 도의, 조화로운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족정신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인륜적 질서가 확립된 사회에서는 법치주의나 의회제도가 없이도 자발적으로 조화와 협동의 질서가 구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체제 변혁에 앞서 도의와 인륜에 입각한 인간정신과 문화의 혁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폭력성을 극복하고, 의리와 인정의 홍익인간 정신에 기반한 민족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는 자주국방과 전민 임전태세확립이다. 냉전 종식 이후 신냉전 시대에 들어서 국가 간에는 실리외교가 지배적이고 현실적으로도 타당성이 있다. 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목매던 과거와 달리 우리도 더 이상 외교적으로 손실을 보며 뒤처질 수 없고 자주적 생존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외세 의존에서 벗어나 자주국방능력을 확보하고, 국민 모두가 기본 군사훈련을 받는 국방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백성과 지식인 모두가 전시에 나서 싸웠던 상무정신의 전통이 있었지만, 지금은 무기력한 개인주의의 난립으로 실종되고 만 실정이다. 이러한 민족정신을 되살려 국민 모두가 상무정신으로 무장하고 전국가적 임전태세를 갖춘 방공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방공국가는 타국을 침략하는 것이 아닌, 민족 자존과 조국 통일을 위한 자력방위 기반 마련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타국의 횡포에 소극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외세에 맞서 싸울 전투태세를 갖출 것이며 힘에 의한 평화 추구는 현실 국제정세에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불가피하다. 그것은 정글처럼 험난한 국제 사회 속에서 우리 민족이 생존과 번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실상 유일한 활로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섯째는 평화세계의 건설과 민족 르네상스의 길이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추상적 보편주의를 내세우며 각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정신문화를 말살하고 서구화된 단일문화로 동화시키려는 온갖 수작을 벌여왔다. 하지만 모든 민족은 각자의 풍토에서 자라 나온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한 민족에게는 자명한 것이 다른 민족에게는 불확실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차이를 존중하는 진정한 다문화주의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우리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은 자국이 처한 모순과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류 해방과 새로운 세계질서 창출을 위한 세계혁명의 과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하여 세계혁명의 앞잡이 역할을 해야 할 사명을 품고 있다. 서구와 동구 사상의 영향 속에서 민족정신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우리 민족이 이를 창조적으로 극복하고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단일문화의 지배로부터 자립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이 하는 것처럼 타민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며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성공이 다른 사람의 성공을 자극하며 자립시키고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한 민족의 해방은 다른 민족이 서구 제국주의와 단절하도록 고무시킬 수 있으며 하나의 독립된 주권을 지닌 국가로서 자긍심을 갖고 당당히 일어서게 할 수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우리 민족의 민족해방은 서구 중심의 단일문화 지배에서 벗어나 새 시대의 근본 원리를 밝히고 진정한 다문화 공생의 세계를 열어가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위 여섯 가지 모두를 종합하여 볼 때 저자 김갑식의 민족혁명 세계관이 목표로 하는 바는 보편주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 민족 혹은 타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보편적인 함의를 갖는다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세계사는 격동하고 있고 일부는 이른 시기에 각성했다. 서구 문명은 이제 막다른 절벽에 도달하였고 한없이 아래로 추락해 가는 전철만을 밟고 있다. 그들이 내세운 시대정신인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는 단어 자체가 갖는 본래의 순수한 의미가 퇴색되어 타민족을 압박하는 수단이자 지배 이데올로기의 상징에 불과하게 되었다. 본서가 밝히는바 이러한 현실을 마주한 우리 민족이 앞으로 어떤 길로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는 떠오르는 태양처럼 명확하고, 모든 정치 지형과 문화 양식이 지각 변동할 수 있는 역사의 변곡점 앞에서 창조적으로 도전하고 나아갈지 아니면 냉소적으로 좌절하고 머무를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필자는 우리 민족혁명 운동가들에게 확고한 철학과 전략 전술, 그리고 민족적 자긍심을 불어넣는 김갑식의 <혁명 철학 원론>은 훌륭한 지침서이며 외부의 적들과 맞서 싸울 우리의 민족혁명 운동가들을 위한 교두보가 되어줄 것이라 자신 있게 단언하는 바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을 완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앞길에 어떤 재난이 닥치더라도 이 책을 읽으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도록 의지를 다지자. 언젠가 스피노자가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에서 말했듯이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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