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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혁명철학원론 해설 (2) 민족혁명의 다섯 차원

최종 수정일: 4월 24일




<혁명 철학 원론>에서 저자 김갑식의 민족혁명 세계관은 다섯 가지 차원으로 제시되고 있다. 민족론, 모순론, 혁명론, 진정국가론, 사생관이 바로 그것으로, 이번 글에서는 이 다섯 차원들 사이의 관계를, 특히 앞에서 뒤로 이어지는 논리적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그 세계관의 유기적 연관을 철학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그러니 필자의 글에서 다소 난해한 표현들이 등장하더라도 본서의 철학적인 세계관을 해설하기 위한 목적이므로 인내심 있게 읽어주시기를 독자들께 당부드린다.


저자가 ‘민족론’을 다룬 장에서 적고 있는바, 그 내용을 요약한다면 민족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유기적 통일체이며, 민족의 공동의식은 그 창조성의 근원이자 제약 조건이다. 그러나 민족의 공동의식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문화의 단순한 대립이 아닌, 전민족적 통일체로 인식되어야 한다. 우리 한민족은 수많은 격변을 겪으며 강력한 공동의식을 형성해 왔고 그것은 계급을 분별하지 않는다. 그러한 공동의식의 연속성에 기초하고 있는 민족은 우리의 정체성의 근원이자 피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피의 숙명이며,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체가 처한 모순과 위기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이 자신들의 모순으로 걷잡을 수 없이 붕괴해 가는 서구 정신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이념이다. 민족은 단순히 전통으로의 회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이루어 내야 하고,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확립하여 독창적인(Original) 이념과 문화를, 즉 창조의 근거를 우리 자신의 기원(Origin)에서 찾는 자기 본원적인 이념과 문화를 정립해야 한다. 따라서 외세로부터 독립하고 조상의 얼을 되살리는 민족혁명의 모든 목표는 바로 모순의 해결,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지양(Aufheben), 즉 전통과 혁신의 양립에 대한 요구로 수렴하는 것이다.


 <혁명 철학 원론>의 철학적 기초인 ‘의식과 실천의 변증법’에서 보다시피 저자는 변증법이란 개념을 전제로 논의를 풀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증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변증법이란 모순을 긍정적으로 활용하여 진리를 찾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본서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모순은 독일 관념론자 헤겔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변증법적 세계관의 중추를 이루는 개념이며, 이때의 모순이란 주지하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로부터 계승된 형식 논리학적인 모순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즉 P이면서 P가 아닐 수는 없다는 (비)모순율에서의 모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모순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순의 극도로 제한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에 따르면 반대로 양극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모순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의 사건들을 구성한다. 요컨대 물질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긍정이고 공간은 그러한 물질의 부정이라고 본다면 모든 운동은 서로 대립하는 물질과 공간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교차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으므로 세계의 자기운동 자체가 이미 언제나 하나의 모순을 내포하는 것이다. 모순이야말로 우주 삼라만상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모순은 우리의 삶과 세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시간이란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단항 개념들 사이의 존재의 질서(순서)”라고 정의했고 그의 말대로 시간,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변화는 그 정의 자체로 볼 때 이미 모순을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과 다른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은, 만약 시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즉, 동시적이라면), 모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80년 5월 18일의 “노무현은 살아있다”는 명제와 2009년 5월 23일의 “노무현은 죽어있다”는 명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시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며, 시간은 그 자체가 언제나 사물을 새롭게 창조하여 기존의 사물을 부정하고 모순을 만들어 낸다. 로크는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논지에서 ‘양말에 구멍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헝겊을 기우고 마침내 모든 부분이 새것으로 대체되면 그 양말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양말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 바 있는데, 생물학의 발견에 따르면 우리 몸도 단 1초 만에 300만 개 이상의 세포들을 갈아 끼운다. 즉 1초 전의 나와 1초 후의 내가 계속해서 모순되며, 그러므로 죽음은 어느 순간 단말마와 함께 찾아오는 의학적 상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수시로 탄생하고 부활하고 있으며 이 명맥은 전민족적 통일체로서 조상이라는 뿌리와 피로써, 혼으로써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매개하는 시간이 모든 현실의 가능 (혹은 초월적) 조건임을 고려한다면, 모순이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실로부터 뻗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이야말로 현실의 사건들을 진정으로 구성하는 요소임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처럼 저자가 말하는 모순은 순전히 내용이 배제된 형식의 모순이 아니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모순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풍부한 내용이 깃들어 있는 현실의 모순을 말한다. 논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율을 개별적 규칙들의 체계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보아 공박하며 우리가 설령 모순을 범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단순한 오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 말처럼 모순 중에서도 현실의 모순은 현실의 그 피상적인 외양을 넘어서 보다 깊숙한 이면을 드러내게 하는 요인이다. 우리 민족은 내우외환에서 비롯된 수많은 모순을 겪어왔고 이를 통해 강인한 전통을 형성해 왔으며 이 전통을 우리가 재인식하는 것이 민족혁명에서 제일의 과제로 떠올랐다. 따라서 저자는 (전통과는 구별되는) 기성의 관습과 규범이 지배하는 평화 시대에는 현실의 모순이 주체에 의해 자각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순이 사회적 자각을 일깨운다는 주장은 독자에 따라서는 다소 모호하게 다가올지 모르나, 그 익숙한 예증으로 끌어올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개개의 사람이라고 해도 어떤 모순에 의해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이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세계에 대해서든 더 이상 깊이 몰두하여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모순, 자아와 타자 사이의 모순, 사랑과 증오 사이의 모순들로 빚어지는 마음의 고통만이 우리를 사색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진리와 윤리의 빛으로, 학문과 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저자는 “생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모순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모순이 없다면 생명의 무한한 자기창조 또한 없을 것”이라고 첨언하고 있는데, 실제로 생명체의 생리 활동은 양성 되먹임과 음성 되먹임이라는 모순적인 기전들의 연속적인 고리를 통해서만 기능한다. 생명이란 하나의 거대한 모순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나아가 신체적 고통은 유기적 의지의 만족과 불만족 사이의 모순이며, 병든 의지, 즉 질병은 이러한 모순을 끊임없이 추동하여 인간의 지성으로 하여금 고통의 해결 방안을 자발적으로 모색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에게도 울혈과 같은 병증이 무척이나 흔했던 것이며, 역사적 위인들도 종종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마음을 고통스럽게 에워싸는 온갖 질병이나 장애, 컴플렉스 따위를 달고 살았던 것이다. 게다가 작가라는 족속들은 이미 다 어느 정도는 내면의 동요와 갈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미치광이들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로부터 직관하는바, 모순이야말로 자기 인식이라는 각성을 향한 최초의 발단이자 계기이며,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적 불안도 이러한 모순의 형이상학적 연장선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하나의 민족공동체도 마찬가지로 모순과 투쟁, 위기 상황에 당면해야지만 공동체 전체의 주체적 실존을 자각할 수 있음이 보다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우리 각자에게는 물론이고 민족혁명 운동에게 주어진 역경과 시련이 아무리 크고 어렵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각성을, 또 성장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음을 몇 번이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순론’ 장에서 김갑식이 밝히는 것처럼 모순과 투쟁 자체는 단순히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며, 우리는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그래왔듯 오히려 그 부정성을 긍정하고 창조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모순이 우리가 선결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고 또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는가. 김갑식은 모택동이 동명의 <모순론>에서 주장한 것처럼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을 구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공산주의자들은 현대의 모순을 계급과 계급의 대립 갈등에서 찾거니와, 자유주의자들은 개인과 국가, 혹은 개인과 개인의 대립에서 찾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순이라고 하더라도 2차적인 모순, 즉 부차적 모순으로서 의미를 가질 뿐 본질적인 모순, 1차적인 모순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계급과 계급의 갈등도, 개인과 개인의 대립도, 세대와 세대, 여당과 야당의 싸움도 그것이 의거하고 있는 정신적 토대인 세계관의 문제와, 또 그것이 근거하는 물질적 토대인 국가적 질서의 문제를 동시에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세계관과 질서가 누구의 어떠한 의식에 기인하고 있는가를 따져 물어야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우리가 봉착할 때, 오늘날의 지배적 사상이요, 또 지배적 질서인 자유주의적 세계관과 자본주의적 체제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그 의식적 성격까지 온전히 파악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는바 보편적 세계관이 아닌 유대-앵글로색슨의 주관적 정신세계의 산물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 그리고 서구적 정신과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우리 민족의 본원적 이상과 심정 사이의 불일치가 주요 모순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주요 모순, 즉 우리가 처한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모순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와 같은 서구적 정신과 빚는 갈등이고, 그 위에서 성립하는 다른 어떤 갈등도 모두 이 하나의 모순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를 옥죄고 있는 이 주요 모순을 먼저 해결하지 않은 채 그 밖의 다른 부차 모순을 해결하려 노력한다고 한들 그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어떤 갈등도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즉 지역 갈등이니 세대 갈등이니 남녀 갈등이니 하는 문제들은 근원으로부터 솟아오른 부산물이요 생명체의 장기를 둘러싼 피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다를 순항 중인 보트 밑바닥에 구멍이 뚫렸으면 그 구멍을 먼저 막아야지 열심히 물을 퍼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모순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여야의 당리당략을 다투는 의회 정치가 아닌 체제의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혁신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주요 모순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자연히 ‘혁명론’으로 이어진다.


김갑식의 혁명론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자연 및 만물의 화합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자연이란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고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이므로, 자연과의 화합은 곧 자연의 질서를 자각하여 시대적 변화에 창조적으로 응전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이런 조화사상을 바탕으로 창조적 정신을 발휘해 왔고 또 현실의 도전에 새로운 사상과 제도로 응전해 왔던 역사였다. 이러한 창조성은 개별 분야뿐 아니라 일대 혁명을 통해 총체적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건국 신화의 환웅신시에서 드러나듯 우리나라의 뿌리에는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혁명적 전통이 있었고, 진정한 전통 계승은 이처럼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창조적 변혁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신라가 불교를 수용한 일도 당시의 역사적 격변에 대한 우리 조상들만의 창조적인 대응이었다. 앞서 다룬 바 있지만 전통과 혁신은 상호 의존적이며 연동되는 개념이지 독립적이거나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을 향한 열망은 저자가 엘리아데를 인용하며 말한 것처럼 인류 보편적인 것이지만, 특히 우리 민족의 역사는 부패하고 타락한 기성 질서에 반기를 들고 언제나 인륜과 도덕적 순수성을 복원하려고 노력해 온 투쟁의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 문화권과 비교해서 보더라도 혁명을 통해 민족정신의 근원으로 회귀하고 새 이상사회를 열어가고자 하는 본원적 심정을 강렬하게 품고 있는 것이며, 민족 모두가 무의식적으로는 외세로부터의 해방과 평화로운 새 세계를 향한 혁명을 절실하게 고대하고 있다. 그 세계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을 우리 민족의 본원적 심정이 추구하는 고향, 즉 진정국가라고 부른다.


 ‘진정국가론’에서 저자는 우리 민족은 본원적 심정과 일치하는 국가적 질서, 즉 진정국가를 지향해 왔다고 말한다. 고대 신시국가는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농경문화와 도의정치가 꽃피운 진정국가의 원형이었다. 신시는 인간과 자연, 하늘과 땅의 조화로운 질서를 구현했으며, 인륜과 의리를 중시하는 인격적 국가문화를 지녔고, 우리 민족은 역사를 통해 이러한 진정국가 이념을 계승하고자 노력해 왔다. 진정국가는 전통과 근대를 초월하는 새로운 국가 이념으로,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진 서구 체제를 극복하는 길이며, 오늘날에도 ‘고향 상실’의 아픔을 겪는 우리 민족에게 국토애와 공동체 의식, 노동의 신성화 등 진정국가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현실 조건에 맞게 민족정신을 구현하는 새로운 진정국가를 창조해야 하고, 이를 통해 민족사적 과제와 더불어 서구 문명의 모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론으로부터 이어지는 ‘진정국가론’은 근본적으로 망각의 극복, 즉 상기에 관한 논의와 결부되어 있다고 하겠다. 플라톤은 모든 진리의 인식은 결국 상기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바, 그 말은 곧 우리가 우리의 한정된 경험 세계로 들어오기 이전에는 모든 진리를 깨닫고 있었지만, 레테의 강을 건너며 다시 태어남과 동시에 그러한 진리들을 전부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는 아는 것은 곧 기억하는 일이 되고 모르는 것은 곧 망각하는 일이 된다. 그런 것처럼 모든 무지는, 특히 지금 우리 민중들의 무지는 단지 일시적인 망각 현상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망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민족의 공동의식을 공유하는 지금 우리 민중들도 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우리가 처한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한지에 대해서 조금도 예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동안 서구 문명과 물질에 대한 선망과 길듦으로 그 문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외면해 왔을 뿐, 땅에 대한 애착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공동의식 속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만약 어떤 발화점을 건드린다면 그 감정은 돌이킬 수 없이 폭발할 것이다.


그런데 혁명을 향한 그 묵은 감정을 폭발시키기 위해서 과연 우리가 어떤 세계관을 취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지침이 되어야 하고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우선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는 그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들 사상이 기반으로 삼는 합리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필연론적 역사관, 즉 역사를 언제나 진보를 향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이 혁명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인간이 중심해 벌이는 사업이요, 인간의 주체적 자각과 의지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이라는 것은 결코 역사적 필연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역사 자체의 운영에 의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과 실천, 그리고 사회 역사적 조건이 일치되었을 때 혁명이라는 것은 성공하는 것이다. 사회 역사적 조건에 인간이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인간의 의식과 실천, 세계관과 운동을 추진하는 인간의 의지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 열번 찍어 안넘어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객관적 조건을 변혁하기 위한 피어린 분투는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실체에서 필연성(형상)과 우연성(질료)이 하나이고 또 그는 “우연성은 실체를 드러낸다”고까지도 말했지만, 합리주의 세계관에서는 우연성이 배제되고 필연성만이 언제고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세계관이 혁명을 질적 변화를 위한 하나의 기폭제로 삼는다 한들, 역사의 결말은 이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전 세계가 지향해야 할 하나의 도덕적 이상만이 존재한다는 합리주의의 오래된 철학적 도그마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다수의 민족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현실의 응집체이므로 각각의 민족 풍토를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라는 단일 이데올로기로 환원할 수는 없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대학교에서 각각의 학과마다 치르는 시험문제와 같다고 하겠다. 물리학과의 문제가 다르고 생물학과의 문제가 다르고 철학과의 문제가 다 다르다. 애초에 문제가 하나가 아니므로 정답도 결코 하나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개개의 인간들은 소위 역사적 이성 앞에서는 한갓 우연에 지나지 않을 주체적 의지와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필자가 앞서 헤겔의 변증법에 관해 적은 바 있기는 하지만 그가 주장한 필연론적 역사관이란 것은 절대정신이 주도하는 ‘역사의 간지’의 흐름 속에서 개개인이 가진 주체적 의지의 역할은 축소되고 소외되며 결정적으로 타 문명을 강대국의 입맛에 맞게 개화시키는 서구 제국주의에 봉헌하고 만다는 난점이 존재한다. 문명이라는 이성의 힘으로 자연이라는 감정의 힘을 정복하고 굴복시키려는 그릇된 욕망은 영미-유태-앵글로색슨 문명 자체가 내재한 그들의 본질 그 자체이거니와 그런 어리석은 오만이야말로 서구 제국주의를 추동하는 근본 인식이며 우리 민족이 척결하고 극복해야 할 최대의 적수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듯 혁명에서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필연이 아닌 인간의 주체적 의식과 실천이 그야말로 무한한 중요성을 지닌다. 특히 민족적 세계관을 가진 소수 전위 세력의 정신무장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연적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또 어떻게 살고 죽을지를 결정하는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사생관’이 뒤따라 나온다.


민족혁명 운동의 기본 준칙은 개인과 조직 차원에서 극기복례를 이루는 자기수양이다. 저자는 우리가 전통적 유교의식에 입각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갈고 닦음으로써만 가정을 보살피고 나라를 다스리며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개인 차원에서의 의식과 실천을 먼저 바르게 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 차원에서의 세계관과 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없기에 우리는 여기서 소수 전위가 얼마나 뛰어난 역량을 함양하는가의 여하가 갖는 그 민족사적 중요성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외세의 지배를 벗어나 역사의 주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 앞서서 우리가 그만한 자격을, 역사의 가혹한 심판대를 통과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따져 물어야 한다.


그러나 단지 개개인이 뛰어나기만 하면 그만인가? 김갑식은 우리에게 고대로부터 이어진 조상의 이상과 후손의 복리를 실현하는 주체적 책임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의를 위해 때로는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강고한 의지가 선제되어야 하며, 신라 화랑정신과 같이 향내적 자각과 향외적 실천을 종합하는 대장부 정신이 바로 혁명 정신의 구체적 실체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순수성에 기반한 민족정신을 계승해야 하고, 개인의 실천을 넘어 조직적 실천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기만 잘나고 동료를 무시하는 인간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족과 운동 전체에 크나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 민족운동 자체가 민족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목적을 가진 활동인 이상, 오만하고 동지애 없는 인격은 혁명에 있어 암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격은 한편으로는 하잘것없는 사적 욕망이 오로지 자기 신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데 집중된 이기주의의 단적인 표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기심을 추동하는 물질주의, 즉 유물론은 민족운동은 물론이고 민족혁명 세계관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민족혁명의 일원으로서 미래를 향한 역사적 사명을 걸머진 우리는 더 이상 개개인이 아니라 민족의 자손이며 각자가 조상들과 마치 하나의 몸처럼 끈끈하게 연결된 전민족적 통일체이다. 플라톤의 ‘세계 영혼’이나 베다 경전의 ‘브라흐마’가 보여주듯이, 우리의 자아는 태어남과 동시에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모두 민족사의 거대한 영적 흐름의 일부인 것이며, 그것은 마치 깊은 수면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다시 잠드는 일과 같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희로애락은 우리 이전에 살았던 무수한 조상들과 공유하는 것이며, 그 말은 곧 우리가 조상이고 조상이 우리라는 뜻으로, 조상의 혼과 우리의 혼은 구별할 수 없이 똑같은 것이다. 조상들의 세대로부터 장구한 시간이 흐른 후인 지금, 오래전 조상이었던 우리가 처음 기원한 일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체험은 옛 어느 조상이 한 체험의 연속으로 나타날 뿐이고 그 점은 후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실상 어떤 새로운 형태의 자아가 발아한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을 지낸 조상들의 성스러운 정신이 각기의 개별적 자아라는 형태로 순서대로 개화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정신 아래에서 저자의 사생관이 강조하는 숭고한 책임의식이 피어오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민족혁명이라는 거대한 정신사적 흐름에 올라탄 이상, 우리는 ‘나 하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를 먼저 미련 없이 내던져 버리지 않으면 안 되며 민족의 무궁한 영광, 그리고 ‘참사랑’ 앞에서 개인으로서의 삶과 죽음은 더 이상 크게 중요치 않은 문제일 것이다.


이로써 필자는 민족혁명 세계관을 다섯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는데, 본서의 모든 내용을 다룰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인 개념 구조를 고찰하려고 노력했고, 적어도 마치 인체로부터 심장, 간, 폐, 신장, 창자를 따로 떼어내면 그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각각의 요소가 민족혁명 세계관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도를 갖는다는 점은 충분히 확인되었으리라고 본다. 여기까지 세계관의 구조에 대해서 논의한 만큼, 다음 글에서는 저자의 본문을 토대로 그동안 이루어진 역사적 민족운동의 총괄과 미래의 민족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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