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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혁명철학원론 해설 (1) 의식과 실천의 변증법

최종 수정일: 4월 19일




글 : Incelmus (민족문제연구회 사상연구부원)

 

저자 김갑식이 출간한 본서 <혁명 철학 원론>은 민족혁명을 위한 지도서이다. 요컨대 민족의 재생과 부흥을 위해서는 자각된 의식과 주체적 실천이, 향내적 자각과 향외적 실천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으로 소수 전위와 다수 대중에게 민족 혁명 과업의 목적과 의의, 실행 원리를 지도하는 데에 집필의 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원리는 두 가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양극의 개념들이 하나의 주어진 현실 속에 함께 있으며, 단지 함께 있을 뿐 아니라 현실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괴테도 유사하게 <색채론>에서 빛과 어둠의 관계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양극의 원리에서 시작해서 상승의 원리, 총체의 원리로 나아갔거니와, 본서에서도 ‘의식과 실천의 변증법’이라는 양극의 원리가 저자의 모든 민족혁명 세계관을 떠받치고 있는 핵심적 기둥이라 하겠다. 각론에서는 다소 변주될지언정 총론, 즉 본서의 전반적인 철학적 흐름은 양극의 원리 속에서 대립자들이 조화를 이루는 이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저자는 도의적 원칙과 야성적 충동 사이에서도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요소 모두가 전인적 인간이라는 상, 즉 우리가 오래전 잃어버린 총체성 안에서 결합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의식과 실천의 변증법’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는 의식적 존재로서 주체적 자각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특질을 지니며, 그렇기에 역사와 문화 창조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런데 의식과 실천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민족혁명이 이미 하나의 이론이자 실험이므로, 여기서 의식은 이론에, 실천은 실험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겠다. ‘관찰의 이론 적재(의존)성’이란 철학적 개념에서 보듯 관찰은 이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실험은 이론을 전제로 하며 우리는 우리의 개념 구조 내지는 선입견 아래에서만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흄이 복사 원리를 통해 설명하였듯 개념은 언제나 감각내용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므로 이론은 실험을 전제로 하며 우리는 세계와 직접 맞부딪치는 경험을 쌓지 않고서는 어떠한 추상도 획득할 수 없다. 즉, 이론과 실험 둘 중 하나만으로는 어떤 연구도 진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민족혁명도 의식과 실천 중 어느 한 요소를 다른 요소와 비교해 그 중요성을 과장해서는 안 되겠다. 의식과 실천, 나아가 세계관과 운동 양자는 각각이 현실에서 독립적인 기능과 역할을 갖지만 서로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필연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이며, 이른바 칸트의 도식론으로 보더라도 의식과 실천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속성이 하나의 도상 아래 매개되고 종합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면 주어진 과업의 달성을 향해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바, 우리가 아무런 행위 없이 이론에만 치우치거나 아무런 사고 없이 실험에만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며,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한 것’이라는 칸트의 그 유명한 구절처럼, ‘의식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며, 실천 없는 의식은 공허한 것’으로서 ‘의식과 실천의 변증법’은 우리가 민족혁명의 과업을 수행해나가는 데에 있어서 다른 어느 무엇보다도 앞서서 준수해야 할 제1의 원리인 것이다.


(주석 : <순수 이성 비판>의 정확한 인용이라면 ‘직관 없는 개념’ 대신 ‘내용 없는 사상’으로 뒷절을 마치는 것이 옳겠으나, 두 절을 대비시키고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 대신 ‘직관 없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필자는 그러한 컨센서스를 따르겠다.)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이러한 의식과 실천의 역사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형성되며,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되고 전승된 민족의 공동의식은 세계관과 운동이라는 대규모의 시대적 흐름으로 발전하게 된다. 공동의 의식 아래 구축된 세계관은 우리에게 현실 인식을 지도하며, 운동은 세계관을 공동의 실천으로 옮기는 양자의 변증법적인 관계로 나아간다. 민족은 시대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세계관과 운동을 창조해야지만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뿐 아니라 생존 번성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우리 민족도 현실 변화에 부합하는 새로운 세계관과 운동의 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김갑식은 이렇게 말한다. :


“세계관과 운동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자신이 처한 바 현실 속에서 현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현실이 변화하면 그에 맞는 세계관과 운동의 내용과 형태 또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이 끝없이 순환하는 바와 같이 자연의 산물인 인간의 역사도 유구한 변천의 과정을 겪는 것이다. 세계관과 운동이란 결코 초시간적 영원적 존재가 아니며 민족의 변혁기에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란 단순히 신의 권능이나 배부른 자들의 유희나 예술가들의 전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창조는 이제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라 의무로 주어져 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이 세계에서는 가만히 있기 위해서라도 전속력으로 내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으며 모든 유기체는 급변하는 환경에 맞게 적응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수십억 년에 걸쳐 살아남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도 그와 마찬가지라 하겠다. 민족혁명은 물론 전통을 계승해야 하지만 우리는 낡은 형태를 고수하지 않고 민족이 처한 구체적 현실에 맞게 언제나 새로운 정신문화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실천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전통과 혁신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총체의 원리로 나아가는 양극의 원리가 적용된다. 일반적인 통념에 근거해서 본다면 전통과 혁신은 상호 간에 배타적인 연관을 맺는 개념들이라고 간주되고는 한다. 전통은 오래된 것을 답습하는 것이며, 혁신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전통이야말로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며, 또 혁신이야말로 전통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라 역설하고 있다. 기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대중 일반에게 생소할 뿐 매우 타당한 것인데, 왜냐하면 저자가 민족혁명이라는 보수주의의 한 갈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 혁명 이데올로기를 전유한 것처럼 여겨져 왔던 소위 진보주의라는 사상도 엄밀히 따지면 과거로의 회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 계약설의 본질은 태곳적 자연 상태의 인간을 예찬하는 것이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도 계급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원시 공산주의를 하나의 도덕적 원형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유럽의 문화혁명으로서 인류 문명의 진보라고 여겨진 르네상스조차도 헤브라이즘에 맞선 헬레니즘의 정신사적 재생을 주창한 것이다. 이것은 보수주의가 진보주의의 혁명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빌려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래의 진보주의조차도 단순히 과거를 버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옛 원형을 찾아 돌아가는 역사의 거대한 순환론적 굴레를 상정하고 있으며 보수주의야말로 혁명 이데올로기의 참다운 원본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서가 지적하듯 우리가 단지 낡은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무사안일한 보수적 태도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좁게는 문명의, 넓게는 자연의 근본 질서를 복원하고자 하는 보수주의를 견지한다면 유신의 혁명은 불가피한 것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뒤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통과 혁신의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타지에서의 여행길로 접어든 경우라도 이미 잘못된 길로 빠져서 허송세월하거나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채로 놓였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먼저 뒤로 돌아가서 그동안 지나온 행로들을 되짚어 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과거와 미래는 하나의 현실 안에 응집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은 과거로부터만 미래를 확고한 실상으로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박정희의 유신 체제를 지지한 학자 이정식의 <10월 유신의 논리>를 인용하며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일반적으로 현재의 체제를 부정하고 과거의 체제에로 복귀한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반드시 어떠한 역사의 역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성숙되고 확립된 체제를 영광된 과거의 복고로서 정통화해 가는 이데올로기적인 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후자의 경우 새롭게 등장한 권력 또는 체제의 정통성의 근거를 새로운 체제 그 자체가 내재적으로 안고 온 ‘모럴’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권위에서 구한다는 점에서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한 정통화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는 것이 된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말하고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덕이란 단순히 양극 사이의 평균값을 내는 것이 아니요, 더구나 항상 중간에 머물러 있는 고정된 중도를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기껏해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는 이념이란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 위에서 표류하는 꼴이 될 뿐이며 이념의 부재에서 비롯한 어떤 어리석은 결과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민족 모두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오히려 양극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하나의 체계 안에서 묘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불편부당한 중용의 덕을 구현하는 것이며, 평화와 전쟁, 안정과 투쟁, 정태와 동태를 별개의 요소로 간주하지 않은 한국 불교만의 고유한 특질로서의 원효의 화쟁 사상이야말로 민족혁명의 철학적 뿌리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특히 안에서는 심신을 갈고 닦고 풍류를 즐기다가도 싸울 때는 목숨 걸고 맞서 싸우는 신라 화랑도의 정신은 평화와 전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임을 보여주는 화쟁 사상의 단적인 예시이다. 저자는 민족의 잠재적인 공동의식, 이를테면 집단 무의식 속에 그러한 한국 전통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보고 거기서 민족정신문화 재건의 가능성 역시 통찰하고 있다. 서구 자유주의에 찌들어 옛 위대한 영광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 보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민족은 무의식적으로는 현세에 뿌리를 두는 인간주의, 조상의 정신을 섬기는 영통주의, 고향으로의 귀소를 염원하는 토착주의를 전승하고 있다. 그것은 수지타산만을 고려하는 황금의 법칙에 대비되는 피의 법칙, 민족적 공동의식의 근본 토대가 우리의 민족혼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정신은 우리 민족 개개인의 머릿속에 아주 분명하게 떠오르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 전체가 일반의지로써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모든 언어와 사고와 행동은 설령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전통과 문화, 그리고 혈통의 숙명적 중력장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잊혀 가는 그 정신을 되살리고 민중의 심정 속에 아로새기는 것이 민족혁명의 역사적 사명이며 그 결과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의 모순을 해결하고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기계로 된 팔다리처럼 부자연스럽고 우리 민족에 걸맞지 않는 서구 근대의 문물과 자유주의, 원자적 개인주의의 병폐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세계주의적 획일화에 반대하고 국민 주권을 바로 세우는 민족주의적 담론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재해석된 민주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재발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저자는 학자 김기두의 언급을 인용하며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열강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사상(민족주의)를 갖게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일종의 사이비 도리를 떠들어 세계주의를 주장하여 우리를 선동한다. 그들은 말한다. 세계의 문명은 진보를 요하고 인종의 안광은 원대하여야 한다. 민족주의는 너무나 편협하여 부적당한 고로 세계주의를 주창하여야 한다고, 근래 우리나라 청년들도 신문화를 주장하여 민족주의에 반대하나 이것은 열강의 감언에 빠진 것이다. (…) 우리들 낙후된 민족은 먼저 우리 민족의 자유평등의 지위를 회복하여야 비로소 세계주의를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세계주의는 민족에서 탄생되는 것이고 우리가 세계의 발달을 원한다면은 민족주의를 강고히 하여야 한다.” 

국가가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김기두의 이 논지가 더욱 명확해진다. 도대체 자기 자신이 먼저 바로 서지 않고서야 어떻게 타자를 수용하겠는가?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소인배와 달리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다른 사람과 어울리나 그들과 같아지지는 않는다고 말했고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서 자신의 4분의 3을 희생”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현상이 개인이 아닌 우리 민족과 국가를 대상으로도 벌어지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타인과 어울리더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지는 말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민족과 국가에도 마찬가지로 아주 동일한 진리가 적용된다. 물론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듯 자아는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이 점을 우리 민족의 관계론적 인간관이 이미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타국과 교류하고 공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정신도 그들의 색채로 물들며 오늘날 몰락해 가는 그들 문명의 타락마저 공유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저자의 논점은 우리 겨레만의 배타적 권리와 폐쇄적 고립주의만을 주장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와 민족의 독립성이 보증된 다음에야 진정한 개방이 있는 것이고 친교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고 강자에게 주눅 들어 산다면 불량배에게 비굴하게 고개 숙이며 아부하고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하찮은 소시민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간 주체로서의 자긍심을 가슴에 품고서 용감하게 “그건 아니야”라고, “더 이상 개입하지 말고 꺼지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과 ‘반인종주의’를 서구 패권에 대한 그러한 굴종의 예시로 언급한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사상을 스스로 형성하지 않았고 자체의 본원적 심정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어떤 준비도 갖추지 않은 채 단지 외부로부터 강요받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중은 서구의 가치를 마치 어느 나라라도 민족적 개별성을 포기하고 세계적 보편성에 입각해 맹종해야 할 지상의 가치인 것처럼 추종하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는 보편성과 개별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에 의해 개별성이 희생되었고 외세로부터 주입받은 추상적인 교조 아래 국내외의 구체적인 현실을 고민하는 자주적인 철학이 실종되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자기들끼리 다 정해 놓았으니 너희는 단지 따라만 오면 된다는 서구의 교조주의가 우리 민족의 정신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저자도 지적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관적 정신세계에 뿌리박고 있는 사상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인 함의를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유사-보편성의 사상을 퍼트리는 서구 열강의 자유주의가 자신들의 풍토병을 우리나라에 전염시킨 폐해, 즉 각자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와 속물근성으로 찌든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끝없는 자극으로 연명하는 쾌락주의, 또 유교적 덕목이 완전히 실종되어 대가족의 해체를 불러일으킨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은 거대 제국의 국권 침탈에 있으며 양극화, 남녀 갈등, 급진적인 성해방, 치솟는 자살률, 저출산 같은 사회적 문제들은 무분별한 자유와 인권 사상의 부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모순 속에 있는 인간만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며, 우리 민족의 지정학적 거점이 서구 열강과 동구 사회주의의 각축장으로 돌변한 한반도이기에 이러한 문제의식이 더더욱 민족혁명의 강력한 동인이 될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이처럼 분단 국가로서 우리 민족이 직면한 모순은 단순히 추상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사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창조적 계기로 승화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극한 상황과 혼돈 속에서 우리 민족은 진정으로 재각성할 기회를 갖는 것으로, 만일 해낸다면 우리는 미증유의 창조적인 문화와 독립적인 새 역사를 ‘도의적 에네르기’와 함께 꽃피우게 되겠지만, 만일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물질로 오염된 정신의 파탄과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 모순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며, 모순이란 개념이 갖는 철학적 의미가 우리의 세계관과 운동에서 언제나 문제가 된다. 다음 글에서는 본서에서 다루는 민족혁명의 새로운 세계관을, 특히 모순이란 키워드와 관련하여, 보다 집중적으로 조명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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