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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한국의 경제개발과 국가사회주의

최종 수정일: 3월 18일




한국의 보수세력이, 건국에 기여한 이승만의 공로를 높히기 위해 종종 인용하는 자료는, 해방 이후 남한사회에서 70%의 대중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하였다는 미군정의 설문조사 자료이다. 이를 근거로 이들은, 국민 대중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이승만이 자유주의 체제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가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은듯 하다. 그러나 과연 '민의'를 무시하고 수립된 체제가 얼마나 '민주적'인가에 대한 물음은 뒤로 하고, 이들은 해당 설문조사를 둘러싼 중요한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1948년 미군정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이 70%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라는 별도의 선택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남한 대중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었는지, 또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수준의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판가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공산주의'와 동일한 범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노선으로서 구분되는 '사회주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일반 사회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대중이 지지한 것은 맑스-레닌주의의 입장이 아니라 이러한 대안적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였음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수세력은 이러한 당대의 정치적 지형도를 무시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일시하는 세간의 통념에 기대어, 일종의 지적인 사기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일반 대중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한국사회를 주도했던 일군의 정치인들, 학자들, 관료들 또한 가지고 있었던 공통된 인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48년 제헌헌법이 통과될때, 대동청년단의 단장이었던 지청천의 언급은 흥미로운데, 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민족사회주의'이며, 이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을 배제하고 양자의 긍정적인 면을 조화시킴으로써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초대 사회부 장관으로서 제헌헌법에 포함된 '이익균점권' 주장을 강하게 주장했던 전진한 의원역시, 대한민국의 헌법은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나 누구나 다 열복할 대헌장'으로서, 한민족의 사상적 대립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국가의 이념적 영도국'이 될 수 있는, 세계사적 의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보수성향으로 친일파와 지주의 정당으로 규탄되는 한민당의 서상일의원이, 헌법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민족사회주의국가'의 지향에 있다고 언급한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실제로 제헌헌법은 미국측에서 이를 두고 '강한 국가사회주의로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만큼, 당시의 지배적 가치였던 자유주의나 자본주의를 염두에 두면서도 국익을 우선하며 이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민족청년단 출신의 문시환과 전진한 등이 주도한 노동자 이익균점권의 사례 뿐 아니라, 제헌헌법 15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시장경제를 제한하며 계획경제를 지향하는 원칙을 정했고, 광물과 주요 자원은 국유로 둘 것을 규정한 85조,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할 것을 명시한 87조의 내용, 운수,통신,금융,보험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을 국영화 또는 공영화한다는 87조의 조항 등은 모두 일정 정도의 사회주의적 발상을 근저에 둔 것이었다.


후지이 다케시의 연구에 따르면, 40년대 중반,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족사회주의'라는 표현은 그리 낯설거나 이질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정치학을 전공한 학자들 또한 민족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쓰는데 거부감이 없었다. 해방 후 최초로 등장한 정치학개론서인 <현대정치학개론>을 집필한 강상운의 경우, 현대의 정치사조의 세가지로 자유민주적 정치관념, 맑시스트적 정치관념, 민족주의적 전체주의 정치관념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의 개인주의가 낳은 것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황금숭배로써, 이를 지양하기 위해 공산주의가 나타났으나, 이 또한 자유주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전복한 것에 불과해,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에 대항해 나타난 것이 '민족주의적 전체주의적 전체관념, 다시 말하면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를 중심에 두지만, 국가기구 그 자체가 아니라 국가를 형성하는 국민을 중심으로, 국가의 재산은 국민 전체의 공동소유라는 민족주의적 입장과 상통한다고 말한다.


"20세기에 있어서 인간이 비로소 사회를 재검토하고 사회 자체를 발견하여 이를 재분석해본 결과 인간이라는 것이 황금과 명예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본주의사회가 근대 자유주의와 연결되어 빈부의 차가 심하게 생겼으며 귀족 대신에 자본가가 대두하여 모든 사회를 지배하게 되니 이는 실로 공산주의의 근원지가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사회제도의 모순 속에서 발생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결점을 여지없이 폭로하였으며 자본주의의 타도를 구호로 세상에 등장하였으니 이는 실로 신 사상계에 거성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과 수십 년 동안에 전 세계를 진동하게 되니 그 이념의 위대함을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반면에 자본주의제도의 불합리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체제를 완전히 개혁하지 못하는 우익과, 공산주의의 급진적 세계혁명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좌익이 대립되어 세계는 이대진영으로 분열되었으며 현대의 번뇌와 고난, 그리고 모든 정치적 난문제는 이 대립으로 인하여 암운을 던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익은 자본주의를 내포한 개량주의의 간판을 걸고 좌익은 세계혁명을 잠재 지양하여 사회민주주의의 간판을 걸고 서로 각축을 다투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과정은 이 이대세력에 반기를 들고 국내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전히 청산하며 국제적으로 세계혁명을 반대하여 제3의 여하한 방식이 없는가 하는 데서 이 국가사회주의 또는 민족사회주의가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 국가적으로 보아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사조도 자유주의에서 전체주의로, 의회정치에서 지도정치로 흐르고 있다. 최근 조선에서도 이에 대한 의논이 대두하고 있으며 민중이 또한 지도정치를 요망하는 모양이니 많이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강상운의 경우와 같이 당시 한국사회에서 논의되던 '민족사회주의' 주장을 파시즘과 나치즘과의 관련 속에서만 논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임시정부의 이념이었던 삼균주의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같은 이념은, 강상운이 말한바와 같은 '민족적 전체주의'라기 보다는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적 경향 또한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민족을 중심에 두고, 무제한적 자유주의나 급진적 공산주의 운동 모두가 민족에 장애물이 된다는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사회주의를 추구하되, 공산주의의 무산자 지배체제가 아닌 국민과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듯 해방 직후 '민족사회주의'의 다양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족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의 담론은 사회민주주의보다는 국가조합주의, 또는 국가사회주의의 형태로 수렴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나 다원주의의 가치는, '취약국가' 대한민국이 초기에 가졌던 대내외적 위기와 모순 상황에서 수용될 수 없었으며, 더군다나 온건한 성향의 사회민주주의자 보다는, 이승만 주변의 국가주의적, 또는 국가사회주의적 인사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49년도에 선포된 '일민주의' 사상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지만, 동시에 '혈통'을 근거로 하는 민족의 일원적 통일과, 지도자에 의한 통일과 단결이 보다 강조되고 있다. 이는 여순사건을 전후,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국방국가화'하는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을 일정 정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개별 노동자의 사적 이익보다는, 국가의 성장과 힘의 증대가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이를 위해 노동자와 자본가는 '노동력을 상품시하는 계급적 사고관'을 벗어던지고 하나의 생산협동체가 되어 '국민전체가 개로하는 일대 노동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1949년 출판된 김홍일의 <국방개론>은 이러한 국가사회주의적 체제에 대한 대략적인 구상을 담은 텍스트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과 일본, 중국의 '총력전이론'에 기반을 둔 이 저서에서 김홍일은 당시 한국이 석유를 가지지 못했을 뿐더러, 분단된 상황에서 자원은 북한에 집중되어 있고, 해외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동시에 장래에도 이를 가질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물자활동과 금융활동을 통일집중하여 통제관리하는 것으로 자유경제조직을 통제경제조직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가 단위에서 원료, 연료, 노동력, 공장, 이윤 등이 통제관리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최고국방위원회'에 의해 물자의 생산과 분배가 일원적으로 통제되는 것을 가장 현실적인 경제재건 방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김홍일이 구상한 최고국방위원회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48년 7월 제헌헌법과 정부조직법에 의해 탄생한 '기획처'의 존재는 제헌헌법과 당시 정치지형의 국가사회주의적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주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획처는 재정과 경제, 금융, 산업, 자재, 물가에 관한 종합적 계획의 수립과 예산 편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조직으로서, 이는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는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막강한 기능을 가진 조직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의 행정조직이 국가의 경제활동 전반을 통제하고 간섭한다는 발상으로, 생산과 분배를 국가가 책임지고 통제한다는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기관이었다. 당시 이 조직을 주도했던 것은 전시 만주국에서 통제경제에 입각한 국방국가의 건설과정을 직접 체험하였던 정현준이라는 인물로, 그가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구상한 것은, 한국의 기획처를 전시 일본의 경제참모본부와 유사한 존재로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기획처가 추구한 경제재건을 위한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 산업긴급부흥정책, 2. 산업건설연차종합계획, 3. 산업별연차생산계획(농․수․광․석탄․전력․공업별), 4. 산업단체정책(업종별․규모별․품종별), 5. 토지개혁정책(농지․개량․국토․도시․도로․하천), 6. 노동정책(실업․임금조정․사회보험), 7. 무역정책(남북․對美․對日․외국통상), 8. 노동계획정책(관민․특수․일반), 9. 과학기술진흥정책, 10. 자금정책, 11. 일반재정정책(공채․조세, 통화, 금융단체), 12. 대일배상정책(배상․재정반입), 13. 관재(管財)정책"

정현준은 계획경제를 공산주의라고 바라보는 것은 어용학자들의 선입견과 정치적 공격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승만의 확고한 지지를 배경으로 정치권의 이념적 공격에 맞서 계획경제체제를 수립하고자 시도하였다. 비록 이는 이승만 개인의 계획경제에 대한 불신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냉전질서의 강화, 또 이에 병행한 민족청년단과 국민회, 대한노총 등에서의 '사회주의적' 경향성의 제거, 조봉암을 위시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거세에 따라 이는 실현될 수 없었고, 휴전 이후 한국사회는 '자유방임경제'라는 명분하에, 사실상 경제개발이 방치된 상태로 남게되어,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으면서도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실패한 기획처의 경제재건계획이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다시 부활한 것은 1961년의 군사정변 이후였다. 이승만 시기의 대한민국을 두고 마치 불 난,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했다고 한탄한 박정희는 만주국을 모델로 한 강력한 경제통제기구인 '기획처'를 설립, 국가주도의 강력한 통제경제를 추구해 나갔다. 보수세력의 말이 맞다면, 그 결과가 보여준 것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5천여년의 가난'을 물리친 위대한 성장의 기적이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게 된 것이다. 보수세력의 말대로, 이승만에 의해 경제가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는 성장했으며, 그러한 성장은 '자유시장경제'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적 경제건설노선으로부터 힌트를 얻은 국가주도의 통제경제에 기반해 있었다는 것이, 보수세력이 은폐하고 있는 한국사의 진실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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