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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이병도 - 신라인의 육체미관




신라의 영육일치의 미적관념


우리 나라의 지리적 환경이 저 희랍(希臘)의 그것과 비슷한 바가 있지만, 두 고대민족의 성격에 있어서도 서로 방불한 것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실을 즐기고 자연을 사랑하고 또 형식을 중히 여기고 미(美)를 애호함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뿐 아니라, 미에 대한 관념에 있어서도 고대신라인과 희랍인 사이에 서로 대응되는 점이 있음을 말하고 싶다.

고대희랍인은 미를 단지 한 가지 성질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다(幾多)의 성질을 갖추어 잇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미는 그 자체에 있어 본질적으로 일절(一切)의 것을 소유한 완전무결한 것으로 보아, 거기에는 진(眞)과 선(善)이 짝하고, 질서와 통일이 자재(自在)한 양으로 관념하였다.

이와 비슷한 관념은 우리 초기신라인에게도 있었던 것 같으니, 그것은 그들의 영육일치관(靈肉一致觀)에서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영육일치관은 시대의 진보에 따라 변모를 나타내고 말았지만, 어떻든 나의 고찰한 바로 보면 초기신라인은 영(靈)과 육(肉)의 모순이라든가 분리를 생각하지 않고 - 말하자면 육(肉)은 영(靈)의 일절의 표현이고, 영은 육의 알맹이인 실체·실상으로 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아름다운 육체에는 아름다운 정신이 담겨 있고, 아름다운 정신에는 아름다운 육체가 짝한다는- 육체일치관과 진(眞)·선(善)·미(美)의 합일관(合一觀)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마치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 담겨 있다고 하는 희랍인의 생각과 같이).

원화와 화랑의 제도


도대체 이것은 무엇으로써 추측할 수 있는가. 나는 첫째로 신라인의 독특한 민간청소년단체인 원화(源花)·화랑(花郞)의 제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원화·화랑의 제도는 신라의 공고한 원시동공체에서 분화발달된 「약자(若者) 두레」, 일종의 인위적인 정신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 공동체(두레)의 초기단장(團長)을 원화(源花)라 하여 원화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써 택하였다. 이렇게 여자로써 지도자격인 단장을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언뜻 생각하면, 원시종교적인 샤아머니즘(무당)의 한 잔재유풍(殘滓遺風)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쉽지만, 그것은 자세치 않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 생활에는 신(神)을 위하는 종교적인 의식이라도 남아 있어야만 하겠는데 그것이 보이지 아니한다. 어떻든 아름다운 여성을 택하여 도중(徒衆)(남자)을 지도하는 단장에 임하였다는 것은 단지 그 형식미(육체미)만을 중히 여기는 관념에서가 아니라, 내용미(內容美)까지도 포함한 표리일치, 영육일치의 관념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것은 화랑의 후신(後身)인 -즉 후일 원화에 대치된 남성단장인- 화랑의 경우를 보아 더욱 그러함을 추측할 수 있다.

화랑은 사기(「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7년조 및 김흠운전론)에는 「미모남자(美貌男子, 미모의 남자)」로써 하여 (아름답게) 장식한다 하였고, 유사(「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조)에는 「양가남자유덕행자(良家男子有德行者, 좋은 집안의 남자로 덕행이 있는 자)」로써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각기 화랑 자격의 한 조건씩을 든데 불과하고, 실상은 양자를 합간(合看)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랑은 단지 미모(육체미)만으로도 아니되고 또 단지 덕행(정신미) 만으로도 아니되는, 즉 양자를 겸비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화랑은 그 의복까지도 화려하게 꾸미었다는 것인데, 이는 원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원화나 화랑의 칭호에 화(花)자를 붙인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정신·육체·의복 모두가 아름답고 화려하여야 하는 -즉 미의 화신과 같이 되어 있는- 화랑의 자격이야 말로 그 전신(前身)인 원화제 창설 이전부터의 원시신라인의 영육일치, 미선합일적 관념의 유산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화랑의 청수(淸秀)한 용모의 미와 그 고결한 정신의 미는 과연 낭도(郞徒) 기타인(其他人)의 흠모의 과녁(的)이 되었다. 삼국유사(권2)에 실린 죽지랑(竹旨郞)의 도(徒)인 득오곡(得烏谷)이 그 스승을 사모하는 「모죽지랑가」와 기파랑(耆婆郞)의 도(徒)요,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또한 그 스승을 찬미하는 「찬기파랑가」를 보면, 더욱 사과반(思過半)함이 있다. (중략)

불상조각에서 찾는 신라의 미


신라인의 이러한 영육일치관은 또한 그들의 조형미술, 특히 불상조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 불상조각은 한 개의 가식(假飾)이거나 한 개의 형식(形式)이라기보다도 곧 불자체(佛自體)의 재현과 같이, 다시 말하면 복식과 육체를 불교자체의 우아한 정신과 함께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라인의 손 끝에 된 수많은 불상 중에도 신라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석굴암의 여러 불상, 특히 중앙연화단상에 올려앉힌 석가불의 반나체좌상을 보라. 그 장엄한 체구, 또 그 장중하고도 자비스럽고 평화스러운 용모라든지, 또 그 떡벌어진 위엄있는 흉부, 그리고 어깨로부터 팔뚝, 손가락에 이르기까지의 율동의 미,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아(高雅)한가! 그 딱딱하고도 무딘 화암석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고 부드럽게 다듬었는가!

우리가 우러러 볼 때, 부지중(不知中, 알지도 못할 와중에) 우리의 손이 거기로 가서 그 부드러운 손가락을 만지게 된다. 그래서 그 손가락에는 사람의 때가 많이 묻은 것도 사실이다. 그 장중(壯重)하고도 부동(不動)의 자세와 침묵에서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이 일개의 조상(彫像)이라기보다 부처의 숭고하고 우아한 혼(魂)과 육(肉)을 아울러 재생케한다는 진지한 신념과 예술적 재능에서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 이병도, 〈설화문학에 나타난 신라인의 육체미관〉中 발췌, 《한국고대사연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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