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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유신체제의 지도이념과 지배담론

최종 수정일: 2023년 12월 13일



- 국립영화제작소 제작 영화 <민족의 재발견(1977)>의 한 장면


얼마 전인 10월 26일은 수십년전,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린 날이기도 했다. 정치체제로서 유신체제는 수십년전 막을 내렸지만, 유신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좌우간 갈등의 주된 소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소위 말하는 진보세력은 유신을 박정희 개인의 집권욕구를 위한 개인독재체제로 비판하는 한편으로, 보수세력은 유신체제가 가져온 조국근대화와 경제개발의 성과에 주목한다. 대부분의 주장이 그러하듯, 이런 주장들은 일면의 진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고전적 도식의 틀에서 유신체제를 해석하려는 오래된 시도는, 하나의 전체로서 유신체제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데 언제나 실패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보수세력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논리로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서구 자유주의를 지양하려 한 유신의 이념이 얼마나 설명될 수 있으며, 현대 보수주의의 시장만능의 논리로 복지국가를 설파했던 유신의 지향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한미 동맹에 대한 맹목적 옹호와 찬사를 보내는 한국의 보수세력이, 민족의 전통문화의 개발과 자주국방의 강화를 외치며 미국과 반목을 거듭했던 유신체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87체제가 가져온 여야대립의 구도 속에서, 오로지 상대 당파를 부정하고 자신의 우위만을 입증하려는 오랜 정쟁의 소재로서의 유신체제가 아닌, 진실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유신체제가 재발견되어야 하겠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편적 진실을 선별하고 재해석하여 자기 당파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국민의 집단기억을 주조한 현대 좌우익의 논리를 넘어서, 그 당시 유신체제를 구축했고 또 그것을 지지했던 이들의 문제의식과 가치체계를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사료된다. 도저히 현대의 진보와 보수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이들의 역사적 고민과 실천을 되짚어 봄으로서, 우리는 진보-보수의 양대 기득권 세력이 강요하는 만들어진 역사를 넘어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며 새로운 역사의 창조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1. 탈냉전과 평화통일의 시대인식


흔히 10월 유신은 반공(反共)을 국시로 하는, 냉전적 체제의 강화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대한 가치판단만이 다를 뿐, 이는 진보와 보수세력 모두에게 당연한 상식처럼 이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72년 유신선포 후 대중에게 공개된 정부의 슬라이드 필림 자료를 본다면, 유신체제의 당위와 관련해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이에 따르면, 유신체제의 국시는 반공이 아닌 평화(平和)이며, 유신체제의 당위는 냉전적 질서의 강화가 아니라, 도리어 국제적 냉전질서의 해체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창조라는 점을 명확히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미 미중간 화해와 닉슨 독트린 등으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대립이라는 도식은 이미 허물어졌으며, 여기서는 더이상 자유진영이 한국의 안보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한민족의 자주적 역량으로서 북한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 서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한민족의 독자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인식은 비단 정부의 선전물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박정희 스스로가 <민족중흥의 길>이라는 저작에서 그 당위를 주장하고 있는 바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념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동ㆍ서 어느 진영을 막론하고 이념의 동질성은 쇠퇴하고 있으며 각국이 처한 사정에 따라 이념의 수정이 과감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념만으로는 국제사회의 분계선을 긋기가 어렵게 되었고 각국의 사정과 이해의 계산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념의 본질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이를 수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보편적인 이념보다는 특수한 민족의 이념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서 박정희의 주장은, 마치 60년대 북한이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주체사상을 선포하고, 비슷한 시기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가진 정치이념을 도출한 바와 유사하게, 한국 역시 자유세계의 보편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자기 나름의 민족적 사고체계를 가진 독자적인 국정운영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70년대의 미중간 화해 무드는 강대국에게는 평화의 기회일 수 있지만, 강대국 아래에서 그들의 무력에 안보를 의탁하며 살아가는 약소국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비상사태일 수 있다. 한국인들은, 68년의 무장공비침투사건과 뿌에부로호 나포사건 당시 미국의 대응에서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따른 안보의 위기를 감지하였다. 더군다나 아시아 민족의 방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의 내용은 또 무엇인가?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미국과 쏘련과 중공의 평화를 위해 약소국은 희생 재물로서 바쳐질 수 있다는 선언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약소국이 희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인식했고 이 비상사태 속에서 자주적인 민족적 생존을 모색해 나아가겠다는데 유신의 당위가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박정희의 언설 전반에서 흐르고 있는 바, 앞서 언급한 <민족중흥의 길>의 내용을 조금 더 언급해 보자.


오늘의 세계는 이른바 강대국 정치가 다시 고개를 드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실로 오늘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강대국 정치에서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단순하지 않다. 이해관계에 따라 어제의 동지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는가 하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고 또 오늘의 적이 내일의 협상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 강대국 정치의 생리요 현실이다. 법도 의리도 인정도 강대국의 이해관계 앞에는 무력하며 옛 동맹관계도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역학관계에 따라 부단히 변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전후해 북한과의 평화적 대화를 기치로 내걸었던 것도, 이러한 상황 인식에 비추어 본다면 납득될 수 있는 것이며,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다. 더이상 과거의 냉전체제는 한반도의 장래를 결정할 수 없으므로, 남북 간의 관계 또한 무력에 의한 대결을 암시하던 과거의 관계에서 벗어나 이른바 평화적 대결의 상태, 다시 말하면 협상과 경쟁을 병행하는 상태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던 것이 당시 박정희의 인식이었다 하겠다. 한국이 강대국 간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유일체제에 상응하는 집결된 국력의 새 체제가 필요하다는 논리인 셈이다. 70년대에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정부가 강력한 안보체제를 기치로 내세우면서도, 한편으로 평화적 통일을 당위로 내세웠던 것은 일견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당국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일회적인 정치공작이 아니라, 탈냉전시대에 한국이 걸어갈 나름의 실천윤리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민족주체성과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


또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구현한 정치제도인 유신체제 또한 이러한 상황인식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민족의 주체성담론, 서구와는 다른 한민족의 특수성이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민족 나름의 독자적 발전노선을 고민했던 사상적 인식은 4.19 이후 한국의 지성계의 일관된 문제의식이었으나, 70년대 경제개발에 따른 서구화의 심화와 주한미군 철수를 비롯한 안보위기 등에 힘입어 이러한 담론은 더욱 더 대중사회 속에 확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박종홍을 비롯, 주체성 담론을 주도한 논자들은 이른바 서구화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규범에 앞서서 그것을 수용하는 민족의 자주적 의지와 결단에 주목하였다. 민족의 현실과 현실을 창조하는 근원적 힘인 전통에 대한 재인식 없이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60년대 초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 논쟁을 주도하여 4.19세대의 주체성 담론에 호응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등에 업고, 적극적으로 민족의 자주정신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미국에서 유입되는 장발, 미니스커트, 록음악 등의 자유주의적 소비문화를 '서구의 노라리풍'으로 단죄하며, 이른바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을 선포하는 등 전통문화의 개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더불어 그 의미 자체로 '영광된 과거의 복고'의 뜻을 가진 '유신'을 단행하면서 내걸었던 명분도 서구로부터의 수입품인 기성의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한국의 특수한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박정희와 유신정권의 이론가들이 주장한 한국적 민주주의란 서구 보편주의 세계관의 붕괴 속에서 민족의 구체적 실존 - 당시 한국적 민주주의론자들의 상당수가 딜타이철학의 전공자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의 우선성을 내세우며, 민주주의라는 수입품의 관념 혹은 제도보다는 그 실천 주체인 한민족의 집단적 특성, 그리고 신념과 의지를 강조하는 담론이었다. 이들이 인식하기에 당시의 한국은 냉전체제의 완화로 자유 - 공산 양대 진영에 속해있던 약소국들이 위기에 처해있으며, 서구의 민주주의는 약소국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 불안, 경제 불황 등에 대처하지 못하며 서구 사회 내부에서도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설파하였다. 당시 유신정권의 이론가였던 이성근은 <발전사 속의 한국 유신>이라는 글에서, 인류의 정신사는 보편주의로부터 특수주의로 이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동양에 있어서 초기에는 주자학의 보편적 이념이 지배했으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실학사상을 비롯, 자신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특수성의 이념으로 전환되어 왔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서구의 민주주의 또한 초기에는 보편적 도그마로서 출발하였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맞추어 민족의 특수성에 따른 과감한 수정과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서구의 민주주의란 서구의 구체적 역사와 문화적 풍토 위에서 자라난 그들의 이념인 것이며, 그들과 다른 역사적 경험과 현실을 공유하는 한민족에게 적용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언제 어디에서나 완전히 적용될 수 있는 객관적 법칙이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며, 민주주의라는 허울좋은 도그마보다, 그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주체인 한민족이라는 살아있는 현실의 인간들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구범모는 '장소의 논리' 혹은 '자아준거의 논리'로서 정리했는데, 이는 과거 타율적인 서구적 민주주의의 모방정치에서 탈각해 한국인이 처한 구체적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제도를 찾아보자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주요 이론가였던 최창규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드러난다.


... 그러나 한국적 민주주의에서 한국은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붙은 단순한 설명적 접두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실천 주체를 뚜렷이 밝히기 위하여 강조된 민주주의의 주체와 국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은 민주주의의 실천 주체인 것이며 민주주의는 그 실천 주체에 의하여 성장되고 인도될 문화이며 역사인 것이다. 그 결과 한국적 민주주의에서는 한국이 민주주의를 위하여 존재하는 공식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민주주의가 그 실천 주체인 한국을 위하여 최대로 봉사하고 공헌해야 할 공식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론자들은, 한민족의 특수성이 형성된 원천인 한민족의 전통 속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 한민족의 전통적 윤리나 민족성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었으나,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는 한민족의 전통 속에서 민족의 자아를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에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적 과제라고 역설하는 면모를 보였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과거의 복고가 아니라, 민족이 당면한 조국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걸맞는 창조적 부활이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 주체의 현실에 입각해 과거를 재발견 한다는 것으로, 박정희와 그의 지지자들이 발견한 한민족의 특성은 서구인과 같은 갈등과 대립보다도 조화와 협동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또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개별적 인간, 혹은 이익집단의 투쟁을 중화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총력안보론이 주장하듯 국민 전체의 단결과 총화에 그 중점이 두어졌다. 특히 신라 시대의 의사결정 방식으로 알려진 화백회의가 한국적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주목되었는데, 여기에서 유신체제 옹호자들이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만장일치의 방식으로 지도자를 추대했다는 점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그들이 창안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민주주의가 있었다고 봅니다. 신라의 경우 애초에 육촌이 있었는데 외침에 대항하기 위해 단합을 하자면 그 구심점이 되는 지도자를 뽑아야 했읍니다. 육촌의 대표들이 모여 토론을 거쳐 만장일치로 박혁거세를 선출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화백제도로서 (...) 우리나라에 서구보다 앞서 민주주의가 있었다는 증좌입니다. - 박정희

다시 말하면 다수결의 원리가 아니라 전체의 총화단결이 민주주의 원리의 근간이라는 것으로, 여기서 개개인은 민족의 일원, 국민의 일원으로서 의의를 갖는 것으로, 개개인의 사적 이해관계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공적 이해 앞에 희생되거나 제약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된다. 자신의 개별적 이익을 과감히 희생하면서, 개체를 초월한 전체의 일반의지를 실현하는 것에 민주주의의 의의가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에 대한 칼 슈미트적 인식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국민을 개인의 집합이 아닌 하나의 유기적 총체로 이해하는 인식, 유기체적 민족주의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본질은 하나의 전체로서 국민적 의지의 실현이며,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순한 다수결의 문제, 머릿수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불가분적 국민의사'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는, 종래의 정당정치가 지배하는 의회민주제 하에서는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당을 초월하는 보편적 국민의지의 대표기구로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신설되었다는 것이, 유신헌법을 기초한 갈봉근의 주장이었다.


재래의 우리나라 헌법에서는 뚜렷한 국민주권의 대표기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 또 역시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국민대표를 주장하였다. 이른바 이중대표의 이론이다. … 그나마도 이 경우의 ‘국민’은 정당 기타 사회집단을 매개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개별이익의 총체라는 성격을 지녔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정당인으로서 출발하였고 정당의 배경을 갖고 당선되었던 것이다. 불가분적 국민의사의 구현체가 아니었다. / 그러나 이번 우리 유신헌법에서는 개별이익을 배제하여 전체적인 일반이익으로 승화된 국민주권의 개념을 ‘현실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탈정당적인 기구를 설정하였다. 대통령은 오로지 ‘불가분적’인 국민의사에 의해서 선출될 수 있도록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마련하였다.

갈봉근의 위와 같은 지적이 암시하듯이, 유신체제 하에서 대통령이란 단순한 특정 정당의 대표자, 특정 이익집단 혹은 국민 일부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의사의 정수를 구현한 보편적 인민주권의 화신이 된다. 유신체제 하에서 대통령의 결단은 곧 국민 의지의 발현으로서, 대통령 개인의 인격과 국민 전체의 인격은 하나로 총화되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지도자의 의지는 곧 국민의 의지이며 국민의 의지는 곧 지도자의 의지로 환원된다. 이렇게 지도자와 국민의 완전한 일체화, - 총화체제의 건설에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 지도자와 인민이 직접 결합하는 형태의 대중민주주의가 실현된다는 것이,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상이론가들의 입장이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신헌법은 의회를 비롯한, 지도자와 인민을 매개하는 중간집단들의 권력을 대폭축소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는 헌법을 명문화함으로서 서구와는 다른 '토착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의 인격과 지도자와 국민의 주체적 의지가 문제가 되는 이상, 여기서 대통령과 인민을 매개하는 것은 법률적 규범보다는 도의적 관계가 중요시된다. 이는 한민족의 전통, 도덕과 인륜적 질서에 명분을 두고 국가를 운영해 왔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정당화 되는데, 유신체제에서 국민과 국민, 국민과 지도자의 결속을 이루어내는 것은 법률에 앞서 민족공동체의 윤리적 규범인 충성과 효도라는 전통적 도덕관념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김형효, 이선근을 비롯한 정권의 이론가들이 70년대 후반 '충효사상'의 열풍을 주도하였던 것, 박근혜의 주도로 전통적 충효관념을 되살리는 관제운동인 새마음운동이 전개되었던 것 등은 모두 국민총화를 위해 전통윤리를 동원하는 박정희정권의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정권은 이 시기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도의사상을 선전하여, 근대화의 폐해로 발생한 서구적 자유주의 문화를 봉쇄하고, 노동자와 기업가, 일반 대중과 지도세력 사이의 균열과 대립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박정희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현할 실천 주체를 도시의 노동자나 기업가보다도 농촌의 농민과 새마을 지도자들에게서 찾았다. 그들에게 있어 도시의 노동자나 기업가, 대학생과 청년들은 서구의 물질문명에 현혹되어 본연의 민족정신을 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농촌의 농민들은 무엇보다 전통적 윤리를 계승하고 있으며, 서구적 문화의 병폐에 물들지 않은 조화와 협동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으며, 새마을운동을 통해 조국근대화의 역군으로 갱신되고 있는 민족사의 새로운 주체였다. 특히 이들의 정치적 의사결정방식, 마을 단위에서 이장과 주민들이 공동의 협의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은, 중앙정치의 과열과 당파투쟁으로부터 이탈한 건전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한 방식으로 여겨졌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천도장이라 칭한 것 또한 농촌과 농민에 대한 변화된 인식과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복지국가론


유신의 한국적 민주주의 체제는 대통령이라는 인격화된 권력을 중심으로 한 전국민의 총화와 단결을 부르짖었다. 정치면에서 이것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전체주의적으로 전유된 민주주의 개념으로 정당화 되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인식의 변화는 경제체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도 연동되는 것으로서, 종래의 자유시장경제 개념은 부분적인 수정을 겪게 되어, 경제 또한 단순한 개인의 생산활동이 아닌 사회조직에 대한 참여행위라는 수정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시장경제론' 이 대두하게 된다. 국민공동체를 단순한 이해관계에 얽힌, 사회계약을 통해 형성된 시민의 결합체가 아닌, 혈통과 인륜에 복속된 유기적 실체로서 이해할 때에는, 정치관념에서 총화 이데올로기가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관념 역시 기성의 자유주의적 경제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관점으로의 변동을 겪게 될 수 밖에 없다. 갈봉근에 의하면 19세기에 있어서 민주주의란 절대군주제에 대항하기 위한 시민적 민주주의였지만, 현대에 들어서 민주주의의 개념은 자유보다는 평등이 우선시 되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적인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는 절대군주제에 대항하기위한 시민적 민주주의였고 20세기의 현대국가에 있어서는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실질적인 사회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사회적 민주주의라고하겠다. 후자에 있어서 사회주의의 발현은 복지사회의 구현을 뜻하고 있으므로 복지국가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이 대두하게 된 것은, 비단 유신이념의 사상적 결론일 뿐 아니라, 70년대 초 전태일의 분신자결, 광주대단지 사건 등을 비롯한 노사간 갈등과 대립이 강해지고, 노동자의 저임금과 소득불평등, 복지후생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기존의 성장일변도의 경제발전에 대한 회의가 커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 기존의 수출지향형 경제발전은 세계 경제 속에서 값싼 임금과 노동력에 기반한 노동집약적 생산에 기댄 측면이 있었는데, 70년대의 상황은 더이상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 속에서 안정된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유신체제는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을 일면 수정하여, 성장을 지속해 나가면서도 노동자와 기업가 간의 안정과 균형을 추구해 나간다는 정책적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로자와 기업가에게 '공익을 생각지 않는 철저한 이기주의나 극한투쟁 방식을 지양' 하고 '봉공의식과 융화협동의 지혜'를 살리라는 박정희의 요청이 보여주듯, 서구의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혹은 스딸린주의적 국가사회주의 체제보다는, 현존하는 기업가와 노동자의 역할을 일단 인정하면서 이들의 협동을 이끌어내어 국가경제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조합주의적 이념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국민총화에 입각한 사회복지의 사례로서는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 혹은 루스벨트 치하의 미국이 언급되었는데, 이 모두 국가의 경제에 대한 강력한 개입과 통제를 추구하는 모델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유신체제가 노동자의 복지를 말하면서도 노자협조를 강조하며 노동 3권에 대해서는 제약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장인 박영기에 따르면 노사협조에 의해서만 기업의 생산성과 능률이 극대화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근로자의 복지 또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근로자의 일방적 희생의 토대 위에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또 생산성을 무시한채 근로자의 임금만 유지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기업가는 근로자를 가족처럼 대우하고, 근로자는 기업을 위해 희생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기업의 부를 국가와 민족에 환원한다는 상호우애의 관점이 필요한데, 이런 태도는 물론 종래의 이기적인 자유주의적인 경제관 속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자유'라는 것은 상대화 되어 무한한 개인주의가 아닌 사회 속에서의 책임있는 자유가 되는 것이며, 국가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경제를 통제하고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형효는 이와 관련하여 뒤르껭이 말하는 동업조합을 언급하며 '노소간의 인격적 대화에 기반을 둔 한국적인 경제질서를 논했는데, 이는 그가 즐겨 주장했던 충효사상에 근거한 국민총화의 이데올로기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더불어 유정회 의원이었던 이성근이 주장한 다음과 같은 내용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경제이념이 종래의 자유주의적 관념에 비교해 사회정의의 입장에서 적극적인 경제제도에 대한 개입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자유라는 개념의 특성은 사회 속에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사회 속의 자유, 또는 사회적 정의의 개념을 내재적으로 포용하고 있는 자유의 내용이란 그 사회의 규범과 함수관계에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 한국적 민주주의는 곧 주체적 민주주의실현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는 환상적 민주주의로부터 현실적 민주주의에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유란 가치 아래 사회적 정의가 유린되던 타율적 민주주의의 환상에서 탈피해 적극적·현실적이며 내실 있는 민주주의의 실체를 찾자는 데 민주주의 한국화의 역사적 당위성이 있다.

제3공화국 시기, 대한민국은 저복지 발전국가라는 수사가 어울릴 정도로 국가 단위의 복지제도가 미흡한 조건에서 경제의 양적 성장에 집중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 나타난 서구적 자유주의 문화의 확산에 따른 개인주의 문화의 팽배 속에서, 유신체제는 정치적으로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총화체제를 수립함으로서 이해 대항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복지국가를 통해 자유주의적 경제관으로부터 이탈하여 부의 균점과 균등 분배를 추구하는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유신체제 하에서 현대 한국 복지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의료보험이나 연금제도를 비롯한 기타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혹은 구상이 이루어졌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 전체가 단결하고 총화되는 유신체제에 있어서는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 행위라는 것은 엄격하게 규제되는 것이며, 국가의 부는 공동생산자로서 국민 전체에게 결국 환원되어야 한다는 발상이 유신체제의 경제관념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신체제가 '100억불 수출'을 약속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경제성장론은 여전히 박정희정권의 주된 정당화 담론 중 하나였던 것이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사회복지담론은 경제성장론, 혹은 총력안보론이라는 여타 담론이 우세해지면서 장기적 전망 속에 미래에나 실현될 수 있는 기획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며, 노동자의 복지에 대한 국가의 직접투자를 회피하면서 기업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였던 것은, 사회 저변에서 재벌의 영향력의 확대를 가져옴으로서 자본우위의 사회를 가속화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총력안보론


복지국가론이나 노자협자론과 같은 담론들은 단순한 생산성증대나 기업문화의 쇄신을 넘어, 안보적인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노자간 단결은 국민총화에 기여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비상시국에서 총력안보의 증진에도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72년 근로자의 날에 국무총리 김종필의 연설은 이와 같은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북괴의 무력적화음모'가 아무런 변동이 없는 상황에서 '국민총력을 기울여 안보태세를 다지고 있는 이때 노사간 대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로자의 권익을 침해하거나 근로조건을 악화시키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인 동시에 이 문제가 곧 국토방위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조갑제와 같은 이들은, 북한이 군사제일주의 노선을 추구한데 반해 한국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추구했기에 오늘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소위 진보 세력에 있어서도 박정희가 추구한 것이 경제지상주의라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유정회 의원이었던 이정식이 79년에 발언한 것처럼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담론 생산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의 문제였다. 앞서 언급한 탈냉전과 미중간, 혹은 미소간 화해의 무드는 강대국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해빙과 평화의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러한 강대국 정치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의 국가에 있어서는 국가수호의 심각한 위기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고, 또 이러한 발상 속에서 유신체제 혹은 한국적 민주주의 체제의 당위가 형성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민족의 생존이 전제가 되었을때 경제성장도, 복지국가도, 민주주의도 실현가능하다는 박정희정권의 판단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기 무엇보다 안보의 문제, 국방의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면 국방, 일면 건설'이라는 슬로건이 암시하듯이, 국방의 정비 없이는 경제의 건설이 불가능하며, 경제의 건설 없이 국방의 태세를 강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박정희의 인식이었다고 하겠다. 경제개발론의 경우 60년대 집권 초기부터 박정희 정권의 주된 화두가 되었으나, 유신체제에 있어서 특히 강조된 담론은 안보상의 내실을 강화하자는 이른바 총력안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신 이후 박정희정권이 선언한 '중화학공업화 선언' 또한, 일반 국민에게는 경제개발의 일환이라는 점이 강조되었지만, 김정렴, 오원철을 비롯한 측근 관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역시 방위산업 육성의 전제로서 추구되었던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체제는 경제지상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안보제일주의 노선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물론 안보 이데올로기 역시 제3공화국 시기 박정희정권이 주장했던 것과 다소 상이한 지점이 드러나는데, 첫째로 과거의 국방 담론이 어디까지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한정된 안보 담론이었다면, 유신시대에 들어서의 국방 담론은 북한을 비롯한 대한민국 외부를 지칭하는 외세 전체가 안보 위협의 잠재적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그러한 인식 하에 미국 조차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입장에서 자주국방론, 자기 나라를 자기 힘으로 지켜나아가야 하겠다는 자주적 국방담론이 대두했다는 점이다. 닉슨의 아지아에서의 '자조' 선언 이후 미국에 대한 불신을 강화해 나가고 있던 박정희는, 미국을 전면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으며 미국과의 관계를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냉전질서가 해체되는 70년대의 흐름에 있어서는 미국 또한 완전히 의존하고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체득하고 있었다. 물론 박정희와 미국 간의 갈등은 뿌리 깊은 것으로, 박정희는 60년대에도 유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대의 자주국방론은 실질적으로는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면서도 단순히 자기 나라를 자기가 지키겠다는 국민차원의 정신무장의 문제로 논의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70년대에 있어서는 병기국산화, 자주적 핵무장을 비롯한 실질적 차원에서 자주방위 논의가 전개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른바 유신의 상징이라 불리는 중화학 공업화 또한, 군수산업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박정희가 유신을 단행하기 1년전 그의 저서 <민족의 저력>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포부는, 외세에 대한 그의 변화된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국제관계의 냉혹한 현실에서 볼 때 우리에게 불어닥칠 도전은 비단 공산집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방안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항상 경쟁의 논리가 작동하고 이해의 대립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치적으로 자주성을 획득하며 적극적으로 민족통일의 이상을 향해 전진해 갈수록 이해관계의 상충에서 오는 외세의 간섭이 우리에게 몰아쳐 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언제든지 발생 가능한 외세의 도전을 국민과 더불어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신의와 존중으로 맺어지는 국가관계가 아닌 경제적 예속과 정치적 구속과 사상적인 획일화를 요구하는 부조리하고 모순된 관계를 결연히 거부해 나갈 것이다.

이미 앞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이 되고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이 되는' 냉혹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언급한 박정희의 언설을 보았거니와, 유신체제에 있어서는 역시 주된 안보위협의 대상은 북한이었지만, 한편으로 전통적인 우방관계에 있는 국가들 또한 오늘의 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위기감, 그렇기에 자체의 힘을 자기 나라를 방어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7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외교의 다변화, 즉 자유주의 국가들과의 우호를 강화하는 한편 비록 공산주의 국가라고 하더라도 남한에 적대하지 않는 국가와는 교류하겠다는 외교정책을 표방한 것이나, 75년 한국에 이슬람 사원을 건립하는 등 반(反) 이스라엘 성향의 아랍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한 것, 가봉을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강화를 추구한 것 또한 탈미국화의 추세 속에서 북한의 제3세계 접근을 차단하고, 미국 일변도 외교에서 벗어나 제3세계 국가와의 우호를 증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총력안보의 이론은 단순히 당시 국제관계의 현실을 배경으로 정당화되었을 뿐 아니라 한민족이 처한 역사를 통해서도 정당화 되었는데, 당시 정부가 민족 중심의 국적있는 역사관 확립을 주장하며 내세운 이른바 '주체적 민족사관'에 근거하면, 한민족의 역사는 '국난극복사', 다시 말하면 외침에 저항한 수난과 투쟁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한민족은 언제나 주변에서 강대국이 대두하면 외부의 침략이나 지배에 시달리는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민족사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와 국민의 총화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소위 국난극복사의 역사관이 주는 지침이었다. 신채호의 역사관을 계승해 제1공화국 초기부터 민족사관 정립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선근이 이러한 역사관을 앞장 서서 주도한 인물이었는데, 제도권 교육을 통해 공식화 된 그의 관점에 따르면 한민족이 중흥기를 이룩했던 신라의 삼국통일기, 그리고 외적에 맞서 국가를 수호한 고려의 대몽항쟁이나 임진왜란, 근세의 3.1운동과 같은 국민운동의 경우는 모두 국민 전체가 총화단결하여 외적에 맞선 빛나는 항쟁사의 일부로서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례가 된다. 유신체제기 대외항쟁을 상징하는 강화도의 유적지를 비롯한 각종 기념사업이 전개되었던 것도, 현재의 총력안보를 정당화하기 위한 국민정신무장의 문제를 빼놓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75년 강화도 전적지를 보수하면서 조선군대가 미국과 백병전을 벌인 광성보에 건국 이후 최초로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 참배를 한 사실은 단순한 우방을 넘어 외세의 하나로서 미국에 대한 달라진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최측근으로서 중화학공업화와 방위산업 육성을 지도했던 오원철에 따르면, 미7사단 철수 후 박정희는 북한으로부터의 자력방위를 추구하는 '자위' 개념을 즐겨 사용했지만, 72년을 전후해 미국으로부터의 자립을 포함한 '자주국방' 개념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오원철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이는 단순한 용어 상의 변동을 넘어선 대외관계 인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자위’라는 용어는 북한의 공격에 대한 방위 개념입니다. 그러나 ‘자주국방’은 대미 관계까지 포함한 국방의 자주성을 말합니다. 국방의 자주화는 한국의 자주화로 발전해 나가게 되죠. 단순한 용어 상의 문제를 넘어선 매우 중대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국난극복사에 입각한 투쟁사관, 현실적으로는 냉전질서의 해체에 따른 안보의 공백과 위기라는 입장에서 박정희정권은 단순한 평시적인 국가체제에서 안보를 강조하는 논리가 아니라, 마치 전시일본의 총력전체제와도 맞닿아 있는, 국방을 위해 정치와 경제와 문화 전반이 동원되는 총력안보체제를 구축해 나아갔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68년의 무장간첩침투사건 이후 연설에서 박정희는 총력전으로서의 현대전의 특질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국방체제'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드러낸 바 있거니와, 안보 중심의 국력의 조직화를 추구하는 유신적 발상은 이미 60년대 후반에 그 맹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맺으며...


시론적인 이 글의 결론을 지어본다면, 유신의 논리는 단순한 집권연장을 위한 방편으로 임기응변식으로 단시일에 제조된 파편적 이론의 집합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그에 상응하는 실천담론들 - 탈냉전담론, 평화통일담론,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 민족주체사관 담론 등을 수미일관하게 구축한 통치이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인 냉전질서의 해체 과정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익이 희생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더이상 외세를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오로지 민족의 총화된 역량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여기로부터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양한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 국민 전체의 봉사와 협조를 촉구하는 노사협조담론과 국민총화담론, 민족의 생존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총력안보론, 외침에 맞선 자주성의 배양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보자는 주체적 민족사관 (국난극복사관) 등이 등장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담론들은 모두 왜정 36년, 해방 후 30여년의 세월을 일본과 미국이라는 외세에 의존해왔던 과거를 자기비판하면서, 한국인 나름의 주체적 발전방향성을 고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실천에 있어서 유신체제가 제시한 수많은 이론들은 궁극에는 집권자 1인의 권력연장, 개인의 권력 강화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박정희라는 카리스마적 인물의 죽음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반쯤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박정희라는 개인의 생사와 운명을 함께할 수 밖에 없었던 점 외에도, 유신의 이념과 가치지향이 국민대중이 납득할 만큼 명확한 상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국민대중 속에 깊이 파고들어 단순히 관제 동원운동이 아닌 민간 단위에서 자발적인 설득과 실천을 이끌어낼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해야 하겠다. 서구식 자유주의가 아직 국민대중 일반의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유신체제는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를 폐기할만큼 과감한 도약을 감행하지도 못하였고, 그렇다고 서구식 자유주의를 그대로 방임하지도 못한채로 외로운 줄타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체제의 제도로서의 한계는 너무도 명확했던 것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유신체제가 민중에게 약속하였던 가치들, 그들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해결책이 금일의 현실에 있어서 전혀 무의미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양적인 성장은 한때 한국의 적이었던 북한과의 비교가 무의미할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은 빈부간의 현격한 격차와 더불어 세계경제에 대한 전면적 예속의 댓가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실이라는 점 또한 잊을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은 경제의 성장이 가져온 소비사회의 풍요에 눈이 멀어 국민정신과 주체의식을 망각하고 개인적 쾌락과 찰나적 만족에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에 큰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조건에서 서구적 자유주의의 병페를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적 역량의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유신의 기본이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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