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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뮐러 판덴부르크 - 맑스주의의 오류

최종 수정일: 2023년 4월 5일




사회주의의 모든 오류는 칼 마르크스의 문장에 있다. “그래서 인류는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 다룬다.”

아니다. 인류는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과제만 다뤄왔다. 여기에 인류의 위대함이 있다. 여기에 인류가 이끄는 창조력(Genius)이 있다. 여기에 인류를 재촉하는 초자연력(Dämon)이 있다. (앞 장에서 Genius와 Dämon은 각각 정령과 악령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절대 현실이 될 수 없는 모든 유토피아의 존재다. 이것은 절대 성취될 수 없는 모든 천년지복설의 소망이라는 존재다. 이것은 항상 고지된 것들에서만 살아 있고 인간에게 관여할 수 없는 천년 제국이라는 존재다.

마르크스는 이 문장을 증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과거로부터 이 문장을 증명하려는 시도만이라도 했다면, 그는 모든 미래가 현재 상상하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는 인식에 굴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밝히고 이렇게 말했다. “더 자세히 관찰하면 이러한 해결 방안에 대한 물질적(materiell) 조건들이 이미 존재하거나 적어도 생성(Werden) 과정에서 파악되는 곳으로부터, 과제가 유래한다는 사실을 항상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제가 스스로 정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누가 이 과제를 정하는가? 누가 과제를 정하고 자신이 발견한 소재적(stofflich) 조건뿐만 아니라 정신적(geistlich) 조건을 위해 사용하는가? 과제의 해결 여부와는 별개로 누가 과제를 정하는가?

마르크스는 소재(Stoff)를 파고 들었다. 하지만 그는 소재 안에서도 정체되어 있었다. 현재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안에 정체되어 있다. 마르크시즘은 물질의 근원을 물질로 되돌렸고 물질의 변화를 밝혀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모든 존재물(Seiende)을 작용과 상호작용을 통해 설명하는 데 그치는 이론적 불충분함으로 유물론적 변증법을 극단으로 몰아갔다. 그는 먼저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소여성(Gegebenheit)으로서 증거에서 출발했다. 그는 원인을 무시하고 계속 밀어냈다. 그는 물질을 물질적 물질, 통계적 물질, 합리주의적 물질의 범주에 가두었다. 그는 세상에는 단지 물질만 있다는 “현세성의 원칙(Prinzip der Disseitigkeit)”를 완전히, 정말 완전히 이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에 대한 내용으로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큰 명성을 얻었고 칼 마르크스가 원래 계획했던 것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남아 있었다. 누가 물질을 움직이는가?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상의 기반으로 삼았던 문장은 발전(Entwicklung) 사상을 수용했고, 마르크스가 “해결된 과제(gelösten Aufgaben)”의 형태로 소개했던 사회주의 완성(sozialistische Vollendung) 사상으로 인해 발전 사상이 사회생활에 대한 것임을 암시하는 자유주의 진보 사상을 능가했다. 마르크스는 발전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이것을 통해 발전은 다른 발전을 통해 필연적으로 생성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연속성이 실현되는 방향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할 목표를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경우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다가올 세기의 사회주의 목표를 의미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사물(Ding)이 발전할 수 있기 전에 생성(Entstehung)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갑작스러운 상태에서 일어나고 일관성을 예측할 수 없는 생성을 전제로 하는 과정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성되고 발전하는 사물 주변에는 과제(Aufgabe)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즉시 어긋나고 교체되는 대응 과제(Gegenaufgabe)가 생긴다고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바다 어딘가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찾는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에게 발견되지 않은 땅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는 물질적인 조건도 비물질적 조건도 모르고, 이러한 전제 조건에서 우리는 그 땅을 밟은 후 그제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 운명이 우리의 자각 없이 운명이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우리의 의지로 서서, 우리의 대담함을 보이며, 우리의 영감의 소리에 내맡겨져 있다. 우리를 위해 예정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섭리에 대해 언급한다.


(중략)


우리의 합리주의적 논리와 진실은 통계적 경험과 현실의 관계와 같다. 이것은 결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도달 가능한 모든 것을 포착한다. 논리는 우리에게 발전에 대한 확신을 주지만, 역사는 발전을 반박한다. 인류는 항상 출발점에 있었고, 이 상태에서 목표는 말할 것도 없고 가는 길에 대한 확신도 없이 결정을 했다. 이 길에 인류의 행적이 있다. 어떤 확실성도 없이 과제를 스스로 정하고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극기로부터 모든 가치가 탄생하고, 우리는 나중에 이것을 역사라고 이해한다. 자유로운 동력에서 탄생하는 가치와 그 사이에서 우리는 내적 상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지만, 어떤 가치와 다른 가치의 진보를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가치들은 계산이 아닌, 재능, 기적, 은총에서 비롯된다. 정말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이 추측하기에 뚜렷하게 나타난 삶을 계산의 본보기로 삼는다. 하지만 창조물을 수정하려는 사람은 계산의 본보기였던 오늘날의 사회주의처럼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 계산에서 역사의 비중은 극도로 작다. 계산은 항상 목적을 위한 수단, 정치적인 인간들에게 당연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계산에도 한계가 있고, 가장 현명한 계산은 어설프고 (현실에) 근접한 측정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과는) 동떨어진 측정 불가능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 목적 그 자체로서 계산은 기껏해야 인간과 상황의 기준에 따라 조망할 수 있는 짧은 기간 동안 유지된다. 하지만 계산을 하려면 항상 공간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추측된, 즉 이미 확실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발전 방향에서 계산을 밀어내고, 계산은 계획들과 함께 대형 폐기물에 던져버리는데, 이 폐기물 위에는 인류의 환멸이 있다.


- 아르투어 뮐러 판덴부르크, 《제3제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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