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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김동리 - 무교(巫敎)의 이승과 저승



우리 말에 이승과 저승이란 것이 있다. 이승은 살아있는 동안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요, 저승은 사후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승 저승이란 말 대신 현세와 내세란 용어를 쓴다. 소위 현세주의니 내세주의니 하는 말이 그것이다.


불교에서는 차안과 피안이란 말도 쓰고, 차생(此生)과 내생(來生)이란 말도 쓴다. 이밖에 전생 차생 내생이라 하여, 삼생(三生)이란 말도 불교에서는 쓴다. 사람의 생명은 이승이 전부가 아니고, 생전과 사후로 연결되고 있다는 사상이 불교에서와 같이 뚜렷하고 투철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합일체로 보는 견해는 가장 원시적인 것이며, 동시에, 고전적인 사상의 기본적인 요소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영혼이란 말대신 정신 또는 이성이란 말로 대치되기도 하지만, 하여간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합일이니 또는 정신(이성)과 육체의 합성체니 하는 것은 모든 고전철학 내지 종교의 기본입장이라 하겠다.


여기서 모든 종교는, 육체보다 영혼이 더 귀중하다는 관점, 그것도 비교과 되지 않을만큼 월등 귀중하며 근본이며 본질이라는 평중론에서, 영혼 구제가 인생의 제일 으뜸되는 과제라고 믿어왔고, 철학에서는 <정신>이나 <이성>이 또한 종교의 영혼과 흡사한 비중을 차지하여 왔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현세보다 내세를 중시하게 되고 (이것은 예수의 모든 설교에서 가장 근본사상이 되어있다.) 불교에서는 차생보다 내생 (또는 후생)을 귀중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세보다 현세가 더 중요하다. 적어도 내세만 못지 않게 중요하다. 하는 사상이 어느 특정인이라든가 특정 유파가 아닌한 시대적인 현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대표적인 역사적 측면을 들라면 그것은 르네상스를 손꼽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한마디로 인간주의 사상의 대두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주의의 대두는 곧 현세주의의 대두요, 인간주의 문명은 곧 현세주의 문명이기도 했다. 이것은 물론, 기독교의 유럽(그것도 처음은 남부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바람이지만 그것

은 어느덧 모든 강물을 흔들어놓은 새물결이되어 지상을 엎게됐다.


내세보다 현세를 귀중히 본다는 사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갈때는 영혼보다 육신을, 신보다 인간을 더 귀중히 생각한다는 말까지 성립이 된다.


오늘날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것도 특히 지성을 자랑하는 교양높은 기독교인들 중에서 개인(신앙인)의 영혼구제문제보다 사회정의의 실현이 더 선행되는 기독교정신이라고 주장하는 사상도 따지고 보면 다 내세보다 현세를 더 중시하는 물결에서 빚어진 결과인 것이다.


나는 물론 이 글에서 그러한 기독교관이 옳으냐 그르냐든가, 기독교의 핵심을 신(여호와신)이라고 보는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부정할 수 없다면, <영혼구제의 문제>보다 <사회 정의의 실현>을 과연 선행조건으로 내세울 수 있느냐던가, 더구나 저 월남의 <사회정의>를 내세우던 기독교지도자 및 신부들이 월남적화의 앞잡이 노릇으로 끝난 사실과 어떻게 다르냐든가 하는 따위를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나(필자) 자신과 같이 처음부터 신보다 인간을, 내세보다 현세를 택한 사람으로서, 인간에 충실하고, 현세에 충실하는 길을 통하여, 신과도 통하고 내세와도 통하는 철학이나 종교를 찾아볼 수 없겠느냐 하는 것이다.


현세와 인간에 충실했던 <파우스트>의 영혼이 끝에가서 구원된다는 얘기를 나는 괴테의 시적 표현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승에서 행한것만큼 내생에서 태어난다는 불교의 인과응보론도 나는 너무나 공식적인 우의(寓意)에 흐른다고 본다.


한국 민족의 원시종교이던 샤머니즘이 종교로서의 체계를 갖추기 전에, 먼저 완성된 기성종교인 불교 유교 기독교들이 들어오자, 그것은 차츰 서민층으로 밀려나가 소위 무당이란 것이 미신의 대명사같이 되어 만인의 천시와 냉소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샤머니즘에서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귀신세계랄까, 심령과학에서 말하는 유계(幽界)에 해당하는 중간세계 같은 것을 처음부터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유계(귀신세계)에 속하는 귀신들을 사람 속에서 쫓아내기도 하고, 저승으로 천도시켜주기도 하는 영매자(심령과학)의 용어를 우리는 보통 무당이라 하며, 무당 자신들은 스스로를 신자(神子)라 부른다.


나는 이러한 샤머니즘에서 내가 위에서 말한 <인간에 충실하고 현세에 충실하는 길을 통하여 신과도 통하고 내세와도 통하는 철학이나 종교를 찾아볼 수 없을까>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든가, 그 실마리라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몇만년간(원시시대부터니까) 잡초속에 묻혀있던 샤머니즘에서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을 찾는 우리의 시각을 한번 그쪽으로 돌려보는 것도 전혀 무의미한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97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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