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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충성 김

대한민국의 전국민 전사화 기획




해방 이후 남한 사회에서는 항일-친일의 이분법과 관계없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사들이 각기 상이한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때로는 결합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부 수립을 전후해 공직에서 좌익이 실질적으로 배제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한국의 정치지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운운하는 입장으로 명확히 정리될 수 없었으며, 미국식 자유주의와 독일과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국가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적 중간파 계열이 여전히 현존하며 스스로의 주체적 입장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공통분모는, 첫째로 민족적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 두번째로 그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국민성'을 형성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취약국가'로 규정한 근래의 연구가 보여주듯,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로부터의 지지와 승인, 그리고 형식적인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들의 통일된 지지와 적극적인 참여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49년 여수, 순천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봉기사태인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호명된 주민들의 상당수가 여전히 한국 국민으로서의 명확한 국민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빈곤과 가난에 허덕이는 다수 국민들의 경우 자기 자신과 가족의 생존에 대한 압박은 정부 차원에서 주장하는 국민적 정체성을 받아들이는데 장애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민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들에게 하나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엘리트 세력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으며, 그들이 형성하고자 하는 '국민'은 무엇보다 서구 자유주의의 계보학에서 일컬어지는 '시민'과는 상이한 존재로 나타나고는 했다.


이들의 인식체계 속에서 국제사회는 강해지지 못하면 낙오되고 도태되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엄혹한 사회였으며, 또 실제로도 당대의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지정학적 경쟁, 그리고 내부의 분열로 심각한 모순과 위기에 처해있던 상황이었다. 여기서 자연히 자유주의적, 시민주의적 가치체계는 부국강병의 논리 속에서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들이 양성하고자 시도하는 '국민' 역시 자신의 개성과 자유를 향유하는 서구사회의 자유시민과는 다른, 민족과 국가라는 대아(大我)를 위해서 스스로의 생명과 재산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희생적 국민, 무엇보다 국가의 위기 속에서 앞장서서 총을 들고 적에게 항전할 수 있는 '전사형' 국민과 같은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식은 구한말부터 애국계몽기에 이르는 시대에 이미 한국의 우익 민족주의자들에게 널리 퍼진 인식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부국강병론을 전개한 민족주의자의 대표적 인물인 신채호의 경우도, 서구의 '자유주의' 열풍을 지적하며 조선사회에 자유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했지만, 그가 인식한 서구의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부국강병을 가능하게 한 원인으로서, 그의 관심과 목표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부흥과 민족의 찬란한 고대적 영광을 재현하는데 있었다.


특히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고구려 시대에 찬란하게 꽃을 피우는 민족의 상무적 기질이 점차 약화되어 조선왕조의 몰락을 불러왔다고 진단하였으므로, 일본의 나토베 이나조, 중국의 량지차오와 같은 이들이 주장한 '무사도'의 한국적 기원을 찾고 이것을 현대에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문신은 나약하고 사대주의적이며, 반면 무신은 강건하고 자주적, 진취적이라는 신념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전>, 그리고 박은식의 <연개소문전>과 같이, 한국의 군사적 영웅들의 전기들이 집필된 것도 이런 차원의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신라시대의 '화랑도'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간의 인식처럼 화랑도의 군사적 측면만이 주목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당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한민족의 상무적 정신의 표상으로 화랑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신채호의 경우 신라의 삼국통일은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힘을 빌린 불완전한 것으로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신라의 화랑도만큼은 고대 조선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족정기의 발로로서, 민족의 자주정신을 표상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1930년대 유럽과 동아시아를 풍미한 소위 총력전 이론은 한국 민족주의자의 국권론적 경향을 강화시켰다. 여기에 따르면 현대전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모든 역량이 집중되고 동원되는 총력전의 양상을 띌 수 밖에 없고, 여기서 전방과 후방, 민간인과 군인, 정치와 비정치의 영역은 일소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상사태에 처한 국가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일원적으로 통제, 관리할 수 있으며 이렇게 집중된 힘으로 모든 힘을 국방에 경주하는 국가체제가 곧 국방국가라고 한다. 이 관점에서 국민은 단순히 자유로운 개체가 아닌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닌 공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 국방국가론은 전시체제기 일본은 물론이고, 일본에 대항하던 중국사회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이는 국내의 친일세력과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항일세력 양자가 이 국방국가론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런 국권론적 사고의 연장에서 해방 이후의 국가엘리트들 또한 한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사대주의의 잔재와 더불어, 문약하고 나약한 지식인적 문화보다 무사적 기질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국가란 단순히 사회계약론적 입장에서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민족공동체의 생활을 담보하는 존재로서 그 자체로 개인에게 충성과 희생과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존재였다.


특히 대한민국 헌법에까지 명시된 '국방의 의무' 항목은, 대한민국의 성립에 자유주의와는 다른 상이한 국가관이 개입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국방의 의무는 단순한 병역의 의무와는 별개로 존립하면서, 병역의 의무보다 상위에서 그것을 포괄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국방이란 단순한 병역의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 국민의 전 생활을 통괄하는 국가생활 전체의 문제라는 의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1948년 출판된 중등 한국사교과서인 <새국사교본>은, 조상의 애국적 정신을 통해 현대의 국민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데, 여기서도 한민족의 역사를 무사적 정신의 전개과정, 외적과의 항전의 기록으로 정리하면서, 한민족이 쇠퇴하였으나 현재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무사도정신의 귀결이라고 말하고 있다.


" 이 때 국내 각처에서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의분에 불타 조헌, 곽재우, 고경명, 정문부와 같은 유자들과 휴정(서산대사) 및 그 제자 유정(사명당) 같은 승려들도 의병(의용군)을 일으켜 도처에서 적과 싸워 혹은 육탄으로 장렬한 죽엄을 한 이도 있고 혹은 적을 쳐부시어 공을 세운이도 있었다. (중략) 이로 인하여 왜군이 차례로 물러갈 새 순신은 이 틈을 타서 왜군을 섬멸하려 하여 고량(남해도와 하동사이) 해상에서 적의 대부대와 어울려 싸우다가 불행히로 적의 유탄애맞어 장렬한 최후를 마치었다. 때는 무술 11월 19일이니 순신의 나이 54세 이었다. 그의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정성과 높고 깨끗한 인격, 위대한 통솔(지휘)력, 또 그 신묘한전략은 모두 세계해전사상에 유례가 드문 것이다." (57p)

이 교과서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국민의 투쟁과 저항, 그리고 계급과 귀천의 차이가 없는 일치단결된 투쟁에 대한 것이다. 실로 교과서는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무인의 위용과 기개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이들이 가진 무사정신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국민 전체의 것으로 사회화되고 또 확장된다. 이러한 교과서의 서술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방위하는 것은 일개 무인, 혹은 무사정신을 가진 엘리트의 존재만이 아니며, 무기를 든 국민 전체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방 후 국민화 담론은, 역사상에 나타난 군사적, 전투적 영웅들의 업적을 단순히 이들에 국한되지 않는, 민족성 전반에 걸쳐 뿌리깊게 이어져 내려온 보편적인 민족의 '전통'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멸사봉공'의 희생정신과 투쟁정신을 기르도록 만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전국민의 전사화 담론의 전개과정에서,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사를 대표하는 무사정신의 화신으로서 화랑이 다시 한번 소환된다. 1949년 이승만에 의해 '국시'로 선포된 일민주의의 주창자인 안호상에 따르면, 고대 신라의 삼국통일은 신라의 '무사도 교육'에 의해 가능했다고 주장하면서, '스파르타 청년', '터키 청년'과 더불어 '신라 화랑소년'이 오직 국가를 위해 살고 죽었기 때문에 세계사에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서정주의 경우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으로 '풍류도'를 소환하면서, 이 풍류도에 내재한 '영통주의'라는 것은 현세에서의 삶을 초월하여 영생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신라의 화랑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바쳤기에 죽어도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풍류교적 사생관'을 심미화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역사학자 이선근은 이러한 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화랑도정신을 한국의 '건국정신'으로까지 정립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데, 그가 49년 출판한 <화랑도연구>라는 책에서는, 한국사의 흥망을 화랑정신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에 따르면 화랑도 정신이라는 것은 비단 신라사회에 국한되어 전개된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찬란한 부흥기마다 되풀이 되어 재현되어 왔으며, 이것은 근래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의 근거인 3.1운동에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들이 모두 화랑정신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자신보다 높은 대아를 위하여 사는 정신, 나라와 민족의 공익적 가치를 위해서는 자신의 사익 추구를 과감하게 극복하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적에게 항전하는 정신이었다. 이 화랑도의 정신을 전국민적인 것으로, 민족정통성의 중심적 위치에 놓음으로써 이들은 전국민을 20세기의 화랑으로, 적어도 화랑의 후예로 개조하려는 것이었다.


전세계적인 냉전질서의 강화과정에 들어서면서 전국민의 군사화 담론은 북한과 그들을 조종한다고 여겨졌던 소련의 '적색 제국주의'에 대한 항전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남한의 엘리트 세력은 대한민국을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정신의 구현체로,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소련 공산당의 사주를 받는 붉은 괴뢰도당으로 폄하하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국민이 가진 민족주의적 열기를 반공투쟁에 동원하려고 하였는데, 이 시기 국민들이 본받고 또 따라야 할 군사영웅의 이미지는 '육탄 10용사'의 표상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던 한국의 군인들이 인민군의 포화를 뚫고 북한군의 토치카에 달려들어 자폭한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정부가 필요로 하던 이상적인 군인의 표상인 동시에, 또 이상적인 국민의 표상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외적과의 싸움에서 포기나 항복을 모르고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희생정신과, 숭무정신의 상징으로서 '육탄 10용사'는 국가적 찬양의 대상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의 주도로 대대적인 추모식과 기념식이 이따랐으며, 10용사의 마지막 순간을 재현한 기념비가 설치되고, 10용사의 위훈을 기리는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렇듯 '인간폭탄'을 자처하며 산화한 이 애국적 영웅들은 일반 국민이 본받아야 할 사회생활의 모델로 숭배되었다. 1949년 말 대한노총 호국전위대 간부였던 이안황의 다음과 같은 연설은, 국가 주도의 '10용사' 표상이 국민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0용사의 정신은 즉 우리의 정신이요, 10용사의 혈관을 흐르던 피도 우리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다같이 10용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비단 군 전선에서 뿐만 아니라 제각기 맡은 직장을 통하여 10용사가 되어야 한다.

이인황은 여기에서 10용사의 '정신'과 그들의 혈관을 흐르는 '피'를 후방에 있는 일반 국민들의 '정신'과 '피'에 등치시켜 동일화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가 전하는 바는, 10용사의 전사적 정신은 단순히 전방의 군인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산업을 재건하는 노동자를 비롯한 일반 국민 모두가 공유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인식 아래 노동조합에서는 '호국전위대'가 창설되고 학생 단위에서는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어, 전국민이 한 사람의 전사가 되어 국방의 의무를 분담하는 '국방국가'로의 전환은 가속화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 초기부터 미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건국되었지만, 초기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론에 의해 획일적으로 규정된 국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식 자유주의와 국가사회주의적 경향,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경향 등이 복합적이고 유동적으로 경합하던 것이 건국 초기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둘러싼 국내외적 위기상황과 내부적 취약성 속에서, 국가를 단순히 개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의 조정을 목적하는 중립적 기구로만 바라보는 자유주의적 관념은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지배적으로 대두한 것은 오히려 국가와 민족의 모든 에너지와 생산물이 국방을 위해 총동원되는 '국방국가'적 세계관이었으며, 그러한 세계관이 목표한 바는 국가의 공적 목적을 위해 사적 이해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며, 호전적인 국민상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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